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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Nov 14. 2020

만나는 사람의 중요성에 대하여


얼마 전 회사원들로만 이뤄진 커플 모임에 나갔다.

중간에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멤버 중 한 명이 오래된 친구에게서 돈을 빌려달라는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근 10년 만의 연락인지라 모르는 척할까도 했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소액을 빌려줬다고 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모두 비슷한 경험을 최근에 한 적이 있었고, 결론은 희한하게도 우리 다 비슷한 수준으로 살고 있어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신세 질 일 없이 살아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서로 건네며 잔을 부딪혔다.

그 순간 나는 공식적으로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회사를 다니지 않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원의 고정급여 덕분에 돈을 빌리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릴 가능성이 적은 신분이라고 남들이 생각해주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회사를 쉬고 있다는 말은 그 자리에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회사원의 신분을 감사해하는 나에게 놀랐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회사원의 신분이야말로 비참한 노예의 삶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뀌는 내 가치관이 우스웠다.

평소에 만나는 사람은 내 가치관에 생각보다 더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내가 평소 주위에 회사원이 아닌 사람을 많이 두는 이유기도 했다. 회사원과는 다른 삶과 다른 생각, 다른 세상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넓은 세상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갑자기 내가 알던 세상이 작아 보이는 경험을 한다. 나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일 뿐이다. 반대로 회사원들과 함께 이야기하면 다시 회사는 내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참 줏대 없고 갈대 같은 삶이다.

보헤미안들은 자신들의 철학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남을 극도로 정제했다고 한다. 그들이 적으로 삼았던 부르주아, 또는 계급적 사상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자신들의 철학이 쉽게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헤미안을 자처한 그들조차 그럴진대 내 사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강남 8 학군에 사는 건 경쟁의 한 복판에서 아이를 키우겠다는 출사표를 던지는 것이고, 대기업에 근무하는 것은 진급과 연봉의 종교를 굳게 믿겠다는 고백이다.

아내는 내가 만약 복직하게 된다면 돈을 차곡차곡 모아 경쟁 없는 시골에 허름한 집을 사자고 한다. 치열한 도시에서의 평일을 이겨내고 주말이면 내려가 집을 고치고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자는 것이다. 도시가 편해서 좋다거나 시골이 평화로워서 낫다는 식의 가치판단을 떠나, 가치관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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