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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Nov 12. 2020

근현대를 주제로 한 소설에 대하여


근현대사에 대한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삶들이 겪어온 심난함과 자질구레한 생활, 운명에 소스라친다. 그 삶과 운명들은 나와 상관없이 아득해 보이다가도, 내 핏줄을 조금만 위로 더듬어 가다 보면 문득 가까워 있음에 소름 끼치곤 한다. 또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소설 속의 시대 상황이 지금 현시대의 삶에서 무엇으로 대체될 수 있는지 한동안 머릿속에 공식이 돌아다닌다. 예를 들면 소설 속의 전쟁이나 피난이 지금의 경쟁이나 이민쯤으로 생각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시대의 변화가 인간의 삶을 조금도 낫게 만들어주지 못했음에 희망을 잃고 이내 염세적인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번 소설은 다르겠지, 하고 생각하며 표지를 넘겨도 매번 같았다. 근현대사를 어둡지 않게 그린 소설은 지금껏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소설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미시적이다.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소설의 장르가 성립되지 않으니 당연한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근현대를 떠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거시적으로 사실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 지겹도록 공부했던 근현대의 사실은 그래서 기억에 남지 않았나 보다. 멀리서 보면 근현대는 잘잘못의 영역이고 강대국의 엘리트들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의 싸움일 뿐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천만 편의 드라마다.  

근현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단연 전쟁일 것이다. 참혹한 전쟁과 그보다 더 참혹한 전쟁 후의 삶들은 퀴퀴한 냄새를 풍긴다. 지금의 세대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규율 없고 폭력만 남은 사회 분위기와 그 안에서 드러나지 않은 채 줄을 타며 살아가는 사람들, 나에겐 그 냄새가 바랜 초록색, 카키색에 가까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군대에서의 생활을 연상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편으로 근현대 소설을 읽는 것은 근현대에 더 가까운 삶을 살았던 어른들에 대한 이해로도 발전된다. 이해나 공감이라고 말하면 과장된 면이 있어 보이고, 다만 이해하려는 노력의 시작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나에겐 그들이 그저 시대 앞에서 힘없이 만들어진, 혹은 썩어간 상처 나고 쭈글쭈글한 과실 같이 생각되어 측은함이 든다. 그들을 이해한다면 사람이 만들었던 부조리들 따위야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그들의 부도덕함과 줏대 없음을 탓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완고했던 마음이 조금은 흔들리게 된다.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인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문학이 제 가치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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