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숙제강박 Nov 30. 2020

빛바랜 인연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오랫동안 사이가 소원했던 친구를 만났다.

코로나 블루로 우울함이 쌓여가던 차에 기분전환 겸, 추억을 되새길 겸 해서 오래된 친구가 생각났다. 마침 얼마 전 다른 친구의 결혼식에서 조만간 한 번 보자고 흘러가는 인사를 했었는데, 그 흔한 인사말을 빈말인 채로 넘기고 싶지 않았던 오기도 있었다. 먼저 연락을 해 날짜를 못 박았고, 우리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겨울의 한적한 캠핑장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약속 며칠 전부터 친구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라든지 함께 술에 빠져 살던 이십 대 초반 시절, 그러다 각자 다른 회사에 취직하고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던 몇 년 전까지. 사이가 소원해진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이유 조차 없는 자연스러운 인연의 생로병사였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친구이긴 했지만 친구라는 단어는 이미 우리 어린 시절의 생생한 빛깔이 아니었다. 우리 관계도 딱 그 빛깔에 맞는 빛바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문득 다시 인연을 붙잡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단 둘이 만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꽤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언제나 모임에서만 얼굴을 마주했었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다가 헤어지면 친구를 만난 건 맞지만 요새 뭐하고 사는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되는 그런 자리들이었다. 그래서 단 둘이 만났을 때 어색하면 어쩌나, 좋았던 옛날 얘기만 늘어놓는 자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캠핑은 어색한 순간을 비워두지 않을 만큼 일거리들이 풍부하다.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차에서 짐을 내린 뒤 텐트와 식탁, 의자, 침구 등을 세팅한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맥주가 당기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런 상태에서 서로에게 맥주를 건네고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른 뒤 잔을 부딪히면 이미 그 옛날 걱정 없고 활기찼던 시절로 돌아간다. 오랜 친구의 관계는 쉽게 어색해지지 않는 성질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서로의 진짜 모습을 잘 몰랐던 지난 몇 년 동안 친구는 내 예상과 다른 고민을 하고 살았단다. 물론 회사원으로서 누구나 느끼는 불안함과 공허감 같은 예상 가능한 고민들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특별하게 느껴질 만한 개인사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는 나에 대한 서운함도 들어있어 한편으로 복잡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관계가 복구 불가능한 수준으로 빛바래지 않아 다행스러웠고 왜 그 긴 시간 동안 둘만의 시간을 만들지 못했을까 하고 자책했다.

예전에는 가까웠지만 지금은 멀어진 사람들을 떠올리면 대부분 내가 가해자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관계라는 것이 100% 일방적일 수는 없겠지만, 나는 언제나 남의 입장보다 내 입장에서 반성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고서야 나는 가해자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내가 인연에서 가해자라는 생각은 관계 회복의 열쇠가 나에게 있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잊어버린 인연들에게 손을 내밀어 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책, 이게 뭐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