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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Jan 09. 2022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려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마련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다. 아이를 기르면서 일을 하는 와중에 짬을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부모는 남들보다 특별한 정신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나 같은 보통의 부모라면 책 읽기와 글쓰기가 애당초 주어지지 않는 선택지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애가 부모를 멀리할 만큼 키워놓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인다.


물론 세상 모든 육아가 24시간 이뤄지지는 않는다. 육아를 하면서 아이가 TV 만화에 잠깐 빠지거나 낮잠을 잘 때처럼 한, 두 시간 정도 자유로워질 때가 있다. 내가 그 시간을 보내는 대부분의 일과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애가 옆에 있어도 언제든 살짝 볼 수 있고, 육아 모드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엔 언제든 끌 수 있으며, 마음을 크게 먹지 않아도 쉽게 온, 오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책 읽기와 글쓰기는 긴 전환 시간과 막대한 정신력 소모를 요구한다. 가끔 억지로 부하를 걸어 빠르게 정신을 전환해 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 읽는 책과 쓰는 글은 여지없이 엉망이다. 단 두 시간만 지나고 다시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책은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고 글은 마치 스무 살 무렵 썼던, 근거 대신 주장만 즐비한 리포트 같이 낯 뜨겁다.


때때로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는 마침 월차인 경우처럼 혼자 긴 시간을 보내는 날에는 충분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역시 책과 글 대신 다른 해야 할 일들이 우선순위를 차지했다. 평소 운동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날따라 운동을 빼먹은 날이 생각나면서 볼록 나온 배를 쳐다보게 된다. 그래서 그 가시적인 죄책감을 이기고자 스텝퍼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는다면 회사 진급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된다는 영어 성적을 위해 영어 듣기 앱을 켰다. 어떤 날은 스텝퍼 위에서 휴대폰을 들고 운동과 영어를 동시에 해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둘 다 해치우고 나면 어느 정도의 뿌듯함을 느꼈다. 말 그대로 ‘해치워야 하는 일’이었지만, 숙제강박인 나로서는 숙제가 처리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책 읽기와 글쓰기는 누가 시킨 숙제 까지는 아니었다. 안 한다고 해서 당장 안 좋은 결과가 나타나거나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종류의 일도 아니었다. 이런 이유에서 그 둘은 우선순위에서 점점 내려갔고, ‘바쁜 시기가 끝나고 여유가 생기면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 일’의 수준으로까지 격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책이요? 언젠간 읽어야죠. 지금은 정신이 없어서요. 글이요? 에이 제가 무슨.” 책과 글을 좋아하지 않는 세상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결심에 한 숟가락을 보탠 것 같은 느낌이라 슬펐다.


그럼 책과 글을 멀리한 덕분에 남은 시간을 현실적인 어떤 것에 활용해 더 잘살게 되었나, 하고 묻는다면 그 또한 딱히 연관성이 없다. 회사도, 건강도, 가족과 친구와의 애정도 다 별반 개선되지 않았다. 대신 책과 글을 멀리한 시간과 현실적인 변화 사이의 유의미한 연관성을 찾아보자면 그건 예전보다 성취한 것에 대해 덜 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혹은 그 이상의 결과를 얻은 경우에도 예전만큼 기쁘거나 스스로 대견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진급을 했을 때는 오히려 진급하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누군가의 간절한 기회를 빼앗았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기에 회사에서는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했지만 말이다.


책을 읽고 글을 썼던 지난날에는 적어도 내 삶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 의도하지 않은 장애물로 인해 잠시 옆길로 빠질 수는 있지만 그 또한 틀리지 않은 방향이라고 믿었다. 너무 많이 벗어난다 싶으면 이 또한 어떤 형태로든 나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신의 의도라고까지 생각했다. 크고 작은 성취가 찾아오면 내가 원하는 삶의 어떤 지점에 조금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만족하곤 했다.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이 있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는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책과 글을 놓치고는 내가 어느 지점에 와있는지 잃어버렸다. 내가 원하는 것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희미해졌고 그 길에 어디쯤 와있는지도 확신이 없었다. 본질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세상이 살라는 대로 살아가다 보니 세상 사람들의 중위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회사에서 진급을 하고도 내가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기쁨과 감사를 강요받는다는 생각에 우울하고 억울했다. 이 모든 게 방향을 잃어서 생긴 변화였고, 책과 글을 멀리하면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독서를 찬양하고 그 최종적인 단계로서 글쓰기를 권하는 글을 수도 없이 봐왔다. 누군가는 그것이 세계관을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으며, 또 누군가는 평생 배우면서 살아가는 ‘학생(學生, 전 생애에 걸쳐 배우는)’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글을 쓰지 않고 읽기만 하는 행위에 대해 어떤 주제를 진정으로 알 수 없는 피상적인 자세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 수많은 묘사에 감히 하나를 보태자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내가 하는 일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주제에 대해 주장과 논지를 탄탄히 하는 과정을 넘어선 어떤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고 내가 나아가는 길을 확신할 수 있게 하며,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일들은 즐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책 읽기와 글쓰기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다시 책을 들여다 보고 키보드를 두드릴 힘을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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