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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Jun 08. 2020

진급에 그렇게 목맬 일인가요?

회사원들에게 연말은 따뜻하고도 잔인하다.

일 년간의 노고를 보상받을 수도 있고 나보다 다른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가격 매겨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해야 하니 말이다.

진급이 이미 몇 차례 누락된 이들에게는 잘 돼야 본전, 올해도 안되면 내년에 겪을 수모에 대비해야 하는 시기다.

연말에는 아무도 진급에 대해 공공연히 떠들지 않으며, 자신이 될 거라는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다.

겸손과 무덤덤한 척이 넘쳐나는 회사의 광경을 보고 있자면 우리 회사 사람들이 이렇게 고상했나 싶기도 하다.


연말의 넘쳐나는 술자리는 진급이 한몫한다.

누군가의 축하자리, 누군가의 위로 자리가 연달아 만들어진다.

진급 성적이 좋지 않은 조직에서는 모두 모여 조직장의 변명을 듣는 자리가 만들어지고,

성적이 좋은 조직에서는 수혜자들 몇몇이 조직장에게 감사를 전하는 자리가 만들어진다.

나쁜 조직장은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어필하고 내년에는 나아지지 않겠냐는 말로 위로를 전하고,

위대하신 조직장은 자신이 위에다 얼마나 손바닥을 비볐는지 무용담처럼 떠들어댄다.


회사에서는 같은 직급끼리 거의 같은 연봉을 받는다.

그래서 돈으로는 회사원의 가치와 노고를 줄 세울 수 없다.

사람을 줄 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잔인한 수단은 진급이다.

진급은 점점 통제가 힘들어지는 젊은이들에 대한 상사의 거의 유일하게 남은 무기다.


하지만 그마저도 예전의 힘과 명성을 잃어간다.

진급에 목을 매지 않는 젊은 회사원들이 늘어가기 때문인데, 이들은 회사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를 일찍부터 포기했으며(혹은 진심으로 원하지 않으며) 고정급여에 대한 의미 외엔 회사에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회사는 체제 순응적인 이들의 집합체다.

남이 시키는 대로 인생의 크고 작은 과업을 완수한 이들이 결국 흘러들어오는 곳은 웬만하면 회사다.

회사의 채용 시스템은 엄청 창의적인 인재를 뽑는 것이 아니라 엄청 순응적인 사람을 뽑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진급은 여전히 대다수에게 무서운 무기다.

체제 순응적인 사람들은 진급에 무덤덤하다가도 동료가 나보다 먼저 진급하는 걸 참을 수 없어하곤 한다.

그게 진급에 술렁술렁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아무리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도 땅이 흔들리는 데에는 버틸 재간이 없다.


지금까지의 의견은 회사를 다니던 날의 내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온 나는 진급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일이었음에 놀란다.

세상에 무력해야 마땅한 일은 사람의 일에서 벗어난 것뿐이다.

천지재변이나 죽음, 나이듦, 질병 따위 말이다.

그에 반해 진급은 사람 아닌 것이 끼어들 틈도 없는 순도 100%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 결정한 일을 하늘이 결정한 일인 것처럼 확대해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늘이 결정한 일이 아니므로 진급이 타고난 내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라고 연말 위로 멘트를 미리 준비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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