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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Aug 24. 2020

반찬통을 씻다 울적해졌다

주말 동안 밀린 설거지를 했다.

음식을 담은 그릇만큼 많은 반찬통이 있었다. 간장 종지만 한 반찬통부터 라면 두 개는 끓여도 될만한 커다란 반찬통까지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묻어있는 것을 보니 쌈장부터 어묵볶음의 기름, 멸치볶음의 고춧가루, 소고기뭇국의 고깃기름, 밥풀이었다. 그릇을 모아놓는 싱크대 한편엔 이미 설거지를 마친 빈 반찬통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처가 옆에 살게 되면서 장모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찬과 국, 찌개, 부침개를 해다 주셨다. 어차피 해야 할 밥과 반찬이며 양만 늘이는 거니 괘념치 말라고 말씀하신다. 처음 몇 달은 영 죄송스러워하지 마시라 손사래를 쳤지만, 이내 때 되면 장모님의 메뉴를 은근히 기대하곤 했다. 이제는 “아휴 뭘 이런 걸 다 주세요, 하지 마세요.”라는 말 대신 “잘 먹을게요. 어머님.”이라는 짧고 의례적인 인사만 입에서 나온다.


장모님이 주신 반찬통을 씻다가 문득 주말 내내 먹었던 장모님의 밥과 반찬들이 생각났다. 우울 해진 건 장모님에 대한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더 이상 요리에 대해 의지가 없는 나에 대한 처량함이었다. 육아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요리는 TV에 나오는 팔자 좋은 셰프들이 하는 귀족적 취미처럼 느껴진다. 요리할 시간도 의지도 정신도 없고 이제는 집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이럴 때는 어떤 간장을 써야 하는지, 집에 있는 조미료들이 유통기한이 다 되진 않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본적인 재료들이 없으니 요리를 한 번 하려면 소금, 설탕까지 다 사야 할 판이다. 그렇게 요리에 대한 벽은 높아만지고, 그에 짓눌려 요리를 못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우리 부부도 결혼하고 나서는 요리에 푹 빠졌었다. 신혼부부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집에서 알콩달콩 요리해먹는 것조차도 재밌고 달달한 취미였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둘이서도 파스타나 스테이크 정도는 예사 저녁이었다. 오죽하면 요리 자격증을 따 볼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필기시험 공부도 하곤 했으니 요리에 의지가 영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나 싶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일상의 상실이다. 어디 요리뿐이겠나. 외식도, 쇼핑도, 골목길을 걷는 데이트도, 밤새 보는 영화도, 철 따라 바꾸던 인테리어도, 주말 아침의 대청소도 모두 지나간 일상이다. 자식은 갖는 순간부터 평생을 마음의 짐처럼 따라다닌다는데, 이제 삼 년 지난 우리 부부는 아직 과거에 연연하기 일쑤다. 매번 이렇게 과거만 미화하다가 또 현재를 과거로 놓쳐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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