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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제강박 Nov 06. 2020

아이가 생긴 뒤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아이를 낳으면 삶의 모든 방식이 이전과는 다르다.

혼자 훌쩍 떠나는 여행도, 카페에서 부부끼리 즐기는 평온한 시간도, 친구들과의 늦은 술자리도 삶에서 없어진다. 그중 인간관계는 변화하는 정도 면에서 제일이다.

우선 아이가 없는 집과의 거리가 생긴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아이를 포함해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어른들이 아이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아이 없는 부부들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설령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부도 만남이 잦아짐에 따라 불만과 불편이 쌓인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거리낌이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멀어질 수 있는 게 인간관계의 특성인데 하물며 불편함과 거리낌이 자리 잡으면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생각보다 더 쉽고 빠르다. 그래서 아이가 있는 집은 언제나 눈치를 본다. 먼저 어딜 놀러 가자거나 집에 초대한다고 연락할 수 없다. 그들이 불편 없이 자유롭게 지낼 하루를 빼앗는 것 같은 마음에서다. 그렇게 약속을 잡지 못하고 매일 아이와 셋이 시간을 보내므로 아이 없는 집에서 먼저 연락해주면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한편으론 아이를 갖지 못하거나 자의로 출산을 미루는 부부에 대한 미안함도 한 몫한다. 결혼을 원하지만 아직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혹여 상처를 줄까 싶어 연락을 미룬다. 물론 결혼을 일찍 하고 아이가 있다고 해서 인생에서 앞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 정해진 과제를 극복해나가는 레이스는 아니니까. 진심으로 아이를 갖는 삶도, 그렇지 않은 삶도 있어야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에게 먼저 낳았다고 으스대거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고 우쭐하지 않는다. 아주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함께 아이를 키우면 좋을 것 같으니 낳으라고 조언을 한 적은 있지만, 순수한 의도가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이제 그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인간관계에 불편함 한 꺼풀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작은 장애물도 큰 산으로 만들어버리는 인간관계의 특성상 태산 같은 장애물이 된다. 조금의 거리낌이 연락을 망설이게 하고, 연락을 망설인 시간이 길어지면 그 시간 자체가 장애물이 되어 관계의 지속을 망가뜨린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과 더욱 깊은 유대관계를 쌓아나가게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이가 있는 집은 현실적인 조건이 잘 맞는다. 거의 모든 경우 우리처럼 약속 없이 아이와 있다는 점과 늘 주말 콘텐츠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가진 부부들과 모두 친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끼리의 궁합이다. 그 집 아이가 우리 아이와 얼마나 잘 노느냐가 인간관계 유지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의 경우, 아이와 온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주말은 평일 동안의 죄책감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래서 주말 콘텐츠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또한 외동인 아이를 주말만이라도 다른 아이와 최대한 교류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 조건에서 자꾸 또래를 가진 부부에게 연락하게 되는데, 만약 그 아이와 우리 아이가 잘 맞지 않다면 만남에서 피차 민망한 상황이 생긴다. 어른들이 잠시도 모여 앉을 수 없도록 싸우고, 울고, 와서 이르고, 조르고를 반복한다. 부모들은 다른 부모와 함께이므로 원래 하던 방식대로 윽박을 지르거나 벌을 줄 수도 없다. 그저 효과 없는 말로 끊임없이 타이를 뿐이다. 그러면 아이와 집에 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지치게 되고, 거기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다 상처라도 생긴다면 쓴웃음을 지으며 “이만 갈까?”가 입 밖으로 나온다. 아이를 키운다는 동업자 의식도 피곤과 민망함 앞에선 풍전등화다.

오래도록 쓰지 않은 페이스북 계정에 들어가 봤다. 별 것 아닌 글과 사진에 댓글이 수십 개 달려 있었다. 그땐 하나같이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 아이라는 행복을 얻었지만 다채로운 인간관계에서 오는 행복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행복인가 보다.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이 커 보이는 이 괘씸한 심보는 언제 고쳐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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