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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Mar 16. 2020

바라보려 한다면 하늘은 항상 그곳에 있을 테니까

공장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회사에는 10분의 쉬는 시간이 있었다. 오후 3시가 되면 짧은 멜로디의 방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면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일제히 손을 멈추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대부분은 탈의실에서 휴식을 가졌는데, 나도 유독 피곤한 날에는 그곳에서 짧게 눈을 붙이고는 했다.


   하지만 햇살이 따뜻한 날에는 탈의실 대신 공장 뒷문을 열고 나갔다. 시멘트 담장이 둘러진 공터에 철제나 황동 봉을 쌓아두는 가건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나무에 못을 박아 만든 간이벤치가 놓여 있었다. 담장 너머로 두껍게 자란 가로수가 가지를 뻗어왔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좁은 외곽 공터는 모두에게 짧은 휴식처였다. 근무시간 중 간간이 담배를 피러 오는 사람이 있었고, 몰래 핸드폰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작업복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구름이 떠다니는 속도 같았다.


   *


   하늘을 자세히 보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면 주홍빛으로 물든 태양이 우리를 반겨주고는 했다. 한 친구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다 다른 하늘을 봐야 한다며 '하루 세 번 하늘 보기'가 목표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제법 인상 깊었던 나는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의 하늘을 놓쳤을지, 그리고 앞으로 몇 번의 하늘을 더 보게 될지에 대해 생각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주변을 가득 채우던 날이었다. 무슨 일을 시작해도 괜찮을 만큼의 시간이 있었고, 잘 해낼 자신도 있었다. 삶은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선물상자 같았다. 마음에 드는 상자를 골라 리본을 풀면, 그 안에 아주 그럴듯한 미래가 들어 있는 것이다. 상자 속에 사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취업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 기대, 가능성은 하나둘 사라지고, 해야만 하는 일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름대로 깊이 고민하고 선택한 회사도 다니다 보면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선택은 성취가 아니라 상실일지도 모른다. 손에 넣지 못한 미래가 어느새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내려가는 것이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세어보다, 지금의 나는 어디쯤 와 있는 건지 생각해보았다. 부유하던 가능성의 하나를 손에 쥐고 지나간 몇 년 동안, 내가 만났던 미래는 어린 시절의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생각보다 더 힘들었고, 생각보다 더 억울했고, 생각보다 더 부족했다. 정신 차려 보면 도망갈 곳조차 마땅치 않은 자신을 마주해야 했다. 가끔은 정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어느 날은, 잠에 취한 아침이나 의기소침한 채 퇴근하던 짧은 순간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아름다운 하늘을 마주하기도 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으로 하늘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 날은 위로가 됐다. 분명 하루 세 번, 고개 들어 바라보자고 다짐한 덕분이었다.


   *


   익숙한 멜로디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길게 기지개를 피고 재빨리 간이벤치에서 일어났다. 다시 철을 깎고, 기계를 고쳐야 한다. 용접해야 할 일도 산더미였다. 공장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하늘을 보며 오늘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지금을 그리워할까?


   지나간 시간 위에서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내고 싶었다. 단순히 돈을 벌거나, 인정을 받거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도 포함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선택한 오늘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일이 아닐까. 때로는 작별 인사도 필요할 것이다. 닿지 못한 미래를 향해 웃어주며, 안녕, 하고 손을 흔든다.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던 가능성이 어느새 마음에 작은 싹을 틔웠다. 답답해도 따뜻하고, 철없어도 싱그러운 새잎이 그곳에 돋아났다. 이 싹은 나무가 될까? 꽃이 될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될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상관없이 소중하게 키워갈 것이다. 가끔 불안하고 무서워도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 바라보려 한다면 하늘은 항상 그곳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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