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소리 할 수 있는 거잖아
솔직히 여기 온 애들 전부 가정형편 어렵거나 인문계에서 대학 가기엔 성적 애매해서 온 거 아니냐. 우리끼리는 뭐 거창한 꿈 있는 척 좀 하지 말자. 하루 종일 벽만 보고 있어도 대기업 보내주면 갈 거잖아? 맞아 아니야? 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정년까지 딱 버틴다. 어차피 하기 싫은 일 하는 거 몸 편하고 생각 안 하면 좋잖아?
과장된 목소리가 사그라들자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프레젠테이션 수업이 끝난 후 쉬는 시간이었다. 목표로 하는 기업과 이유에 대해 발표 준비를 해오는 숙제를 받았는데, 한 친구가 이에 대한 반발심과 장난기를 섞어 ‘숙제라고 거짓말하지 말고 다들 팩트만 말하자’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 해는 유독 ‘팩트’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졌다. 개개인에 따라서 민감하다고 느껴질 법한 이야기도 가감 없이 들어내고, 누군가는 가끔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주변 아이들은 무척이나 잘 웃었다. 나도 곧잘 웃었지만, 즐겁다기보다는 진지한 표정일 때 맞이할 언짢은 상황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그런 분위기 속에서 K와 나는 서로의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괜찮은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재학 3년 동안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음에도 우리가 친해진 건 번호순으로 이어지던 기숙사 방 배정 덕분이었다. 각자 반에서 가장 앞번호와 뒷번호였던 우리는 2학년부터 같은 방에서 지내는 룸메이트가 됐다.
K는 밴드부에서 드럼을 쳤는데, 다른 악기도 수준급으로 다룰 줄 알았다. 학교 애들은 리듬을 못 맞춰서 드럼 안 맡겨. K는 그렇게 말하며 내 기타를 끌어안았다. 아 니꺼 치라고. 일렉기타를 엠프 없이 어떻게 치냐.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그의 연주를 기대하고는 했다. 중학생 때 구매해 몇 년간 쳐왔던 통기타는 K의 손에만 들어가면 전혀 다른 악기가 되는 것 같았다.
K는 정말 하루 종일 기타를 쳤다. 기숙사로 돌아오면 교복을 갈아입기도 전에 기타를 잡았고, 내가 동아리 활동으로 늦게 돌아올 때면 어느새 방안을 경쾌한 소리로 가득 채워놓고는 했다. 너 공부는 언제 하냐? 안 해. 1학년 때는 성적 좋았다며? 그때는 했지. 지금은? 안 해. 나는 속 편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취향과 성격이 비슷해서인지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K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그가 공부를 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단지 숨어있어도 좋을 것들까지 민낯을 드러내는 ‘팩트’의 세계가, K의 기타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는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예비 고졸도, 취업 준비생도, 반백수도 아닌 평범한 열여덟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
예상보다 일찍 시작된 더위는 물러갈 때가 되어도 쉽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오후가 되면 투명한 열기를 담은 햇살이 도시 위로 쏟아졌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누군가의 입김처럼 때로는 불쾌하고, 때로는 두근거리는 미묘한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다. 방학 동안 나는 동아리 실습과 로봇대회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K도 자기 나름대로의 여름을 즐겼다.
교회에서 밴드를 했어. 개학식 날 돌아온 K가 말했다. 학교 밖에선 드럼 대신 기타를 칠 수 있어서 좋다고. 그러면서 새로 산 기타에 대한 자랑을 이어갔다. 너 원래 레스폴이었잖아? 무거워서 팔았어. 노을빛으로 전신을 덮고 있던 묵직한 K의 기타를 기억하던 나는 어이가 없었다. 좋아하는 소리도 바뀌고, 다시 선택하고 싶어졌어.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며 그는 케이스에서 새로운 기타를 꺼내 들었다. 검정색과 흰색이 대비되는 바디가 균형감 있는 곡선을 보기 좋게 내보이고 있었다.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였다. 가벼워서 좋아. 한껏 만족해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
방학이 끝나고 변한 건 레스폴만이 아니었다. 새로 산 기타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인지, 방학 동안 정말 원 없이 연주한 것인지는 몰라도 K는 2학기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전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자습실에도 간간이 얼굴을 비췄다. 기숙사 방에서 그의 연주를 듣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있는 K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중간고사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자유 외출이 허락되는 수요일이면 우리는 기타를 들고 바다를 보러 갔다. 학교 뒷문으로 나오면 멀지 않은 곳에 해수욕장이 있었다. K와 나는 긴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지칠 때면 모래사장에 걸터앉아 서로의 기타 연주를 들었다. 거창한 꿈 따위는 필요 없는, 소박한 미래에 대한 기대가 파도처럼 흩어졌다.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면 좋을 텐데. K가 말했다. 취업해도 사무직으로 하고 싶어. 너는 기계도 잘 다룰 것 같은데. 기계는 싫어. 왜? 그냥 싫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편한 일을 하고 싶은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우리가 배우는 일을 애써 비하하거나 우습게 보고 싶지는 않아.
K는 바다를 응시한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붉은빛으로 타오르던 태양은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도 공장에서 일하는 거 가지고 농담하는 거 안 좋아해. 지들이 뭔데 함부로 말해. 뭐가 팩트고 뭐가 사실이야? 다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소리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를 눈치챈 K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짧게 심호흡을 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아빠가 공장에서 2교대로 근무를 했거든. 어릴 때부터 그 모습을 보니까 조금이라도 아빠한테 도움이 되려고 이 학교에 온 거야. 내가 일찍 돈 벌면 아빠가 조금이라도 편해지겠지 싶어서. 그런데 작년 이맘때 아빠가 공장에서 사고로 돌아가셨어. 프레스에 깔렸다는데. 그 얘기 들으니까 도저히 기계 못 만지겠더라.
하늘로부터 다가오는 어둠이 천천히 바다를 가리고, 바로 옆에 있는 K의 모습까지 덮어버렸다. ‘사실’이 희미해지면서 온 세상이 흑백사진처럼 변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주변을 확인하려 하기보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옅은 파도 소리에 의지해 눈 앞에 펼쳐진 바다의 윤곽을 더듬어보았다.
한동안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싶더라. 학교도 집도 다 짜증 나고. 자퇴할까 생각도 했는데 어차피 다른 학교 가도 공부할 마음도 안 들 것 같아서, 그냥 계속 음악만 했지. 연주할 때는 딴생각 안 하니까. 지금도 딱히 괜찮지는 않은데, 더 이상 멍하니 있는 것도 싫어졌어. 공부도 하고 고민도 해야지. 될 대로 되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다시 선택하고 싶어졌어.
돌아갈 시간이었지만 나와 K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각자가 지나왔던 삶의 어딘가를 그 윤곽에 비추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누구의 어둠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상상하지 않았다. 다만 옅은 파도를, 어딘지 모르게 서글프고 조용한 기타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