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여전히 프로그램이 끝나고 조금 더 공간의 문을 열어둔다
어느 밤이었다. 그는 한 차례의 모임이 끝나고도 공간에 남아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자리에 앉아 사람들이 남긴 과자와 미지근한 커피를 마셨다. 환대와 진행은 제법 능숙해졌지만 흐름을 끊어내고 타인의 기대를 거절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시간이 늦었다고, 오늘 프로그램은 여기서 마무리 하겠다고 말해야 했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건 오늘 어떠셨냐는 물음이었다. 그는 이런 모임이 처음이라 버스 종점에 내릴 때부터 걱정이 많았단다. 긴장했지만 분위기도 편했고 함께 한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 좋았다고 말했다.
수줍은 얼굴에 스친 웃음. 편안해 보인다. 커뮤니티로 만난 사람에게 되도록 외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어느 때엔 정보의 공백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잣대 없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그를 위한 물러섬이기도 하고 나를 위한 방어선이기도 하다. 나 역시 무척이나 좁고 편협한 인물이기에 듣게 된 그의 직업이 제법 안정적이면 일상과 감정에 대한 평가가 앞선다. 묻어나는 여유와 따뜻함은 그의 삶이 안정적이라 가능하다는 좁은 편견과 꺼내지는 힘듦은 배부른 고민이라는 치기어린 판단 말이다. 커뮤니티를 시작하며 새겼던 나름의 준칙이지만 이번엔 다른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어떤 일을 하시는지 물었다. 많이 지쳐 보인단 말도 섞었다. 그의 직업은 텔레마케터였다. 수화기 넘어 상대의 감정을 마주하고, 상대의 말을 놓침 없이 듣고, 적절한 말을 재빨리 꺼내야 하는 일. 그렇게 하루 종일 대화했는데 어떻게 다시 사람을 만날 동기 혹은 에너지가 생긴 건지 물었다. 그는 여전히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와 마주보며 대화하고 싶어서요.”
오늘 하루 그와 전화로 만났던 사람들은 수화기 너머에 존재하는 수줍은 미소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이렇게 눈을 보며 마주 앉지 않는다면 경험하지 못할 미소다. 텔레마케터란 직업은 언뜻 나와 역할이 닮아 보였다. 하지만 친절로 거친 감정을 받아내고 사과로 날선 요구를 해결해야 했으니 나보다 훨씬 지친 하루였을 테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나누고 싶었지만 평일에 허락된 귀가 시간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짧디 짧을 뿐이다. 언제나 내일을 위해 서둘러 닫아야 하는 오늘.
내내 사람과 전선으로 연결되었던 이가 해가 지고 작은 커뮤니티를 찾았다. 사람에 의한 지침을 사람을 통해 회복하겠단 기대를 품은 채 오늘 밤 우린 만난 것이다. 집중해 프로그램을 진행했지만 정작 텅 빈 공간 그와 단 둘이 앉은 테이블에서 뜻하지 않은 커뮤니티가 시작되었다.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우린 서로에게서 힘을 얻고 확인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수십 시간을 대화했지만 여전히 그에겐 ‘사람’과의 연결이 필요했고,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사람을 초대해내고 환영했지만 나 역시 ‘사람’과의 연결이 필요했다. 서로의 지친 순간이 교차될 때 우린 점진적으로 회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의 미소엔 어딘가 묘한 느낌이 숨어있었다. 타인을 향한 나의 미소에도 그와 같은 느낌이 묻어나길 바랐다. 짧은 만남 이후 그가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알지 못한다. 공간을 다시 찾지 않는 걸 보면 일상이 더욱 바빠진 것 같다. 많은 걸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만 사람과 누군가와 마주보며 대화하고 싶다던 기대가 그리 나쁘지 않게 충족된 것 같아 다행이다. 커뮤니티가 사람과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심어낼 수 있다면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낸 게 아닐까. 오늘도 여전히 프로그램이 끝나고 조금 더 공간의 문을 열어둔다. 독특한 일상을 보낸 누군가와 우연으로 연결될 새로운 커뮤니티를 기대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