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밀밭 Jun 01. 2020

누군가의 여행지엔 누군가의 삶이 있다

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각자 남에게 말 못 한 사연들이 있겠지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활기가 있다. 어두워진 거리에서 활기는 술집에 불을 밝히고, 그 빛은 또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저마다의 테이블에서 저마다의 이야기가 피어올라, 낯설기만 느껴지던 신주쿠의 밤거리는 어느새 친숙한 소음으로 뒤덮였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다 보면 잠시 머무는 관광객인 나도 이 도시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돈을 너무 많이 쓰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종업원에게 일본어로 닭고기 요리를 주문하며, J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평소였으면 경비의 절반만 있어도 충분했을 텐데 일본에서도 이 시기는 연휴 기간이라 어쩔 수가 없네. 에이, 아빠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나랑 태준이도 다 직장 다녀서 이때 아니었으면 못 왔는데요 뭐. J는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연휴와 주말을 껴야 겨우 갈 수 있는 해외여행이었다. 현장직의 특성상 연차를 내는 것도 쉽지 않고, 필연적으로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누군가 대신하게 되는 걸 알기에 마음도 편치 않았다. 여행을 망설이게 되는 이유에, 처음부터 비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번 여행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일본에서 생활하셨던 J의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는 했다. 1980년대의 도쿄. 신주쿠의 밤거리와 츠키지 수산시장의 새벽 풍경. 생생한 경험담은 타국의 도시를 상상하게 했다. 너희들 데리고 도쿄에 한 번 가야 하는데. J의 아버지가 중얼거리고, 나와 J가 말을 받았다. 가시죠! 그래 아빠, 이번 연휴에 비행기 예매하자.     

  

  *


  그렇게 다소 즉흥적으로 도쿄 여행이 결정되었다. 우리는 주말과 석가탄신일이 붙어있는 5월 연휴로 일정을 잡았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르겠다. 친구와 친구의 아버지와 떠나는 해외여행이라니. 무슨 조합이 그러냐고 말이다. 하지만 J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한정된 시간과 비용으로 떠나는 여행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졌을 테니까.


  그가 정성 들여 나와 J를 데리고 다녀준 덕분에, 우리는 <동경만경>의 배경이 되는 오다이바를 걷고, <너의 이름은>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붉은 계단을 오르고,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가 생각나는 노을빛의 시모키타자와를 볼 수 있었다. J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다양한 도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신주쿠의 밤, 가부키초의 거리도 그중 하나였다.     


  *


  유독 요란한 간판들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거리. 다른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호객꾼들도 이곳에서는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너희끼리 도쿄에 올 일이 있어도 여기서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J의 아버지는 가부키초 거리에서 주의해야 할 일들에 관해 설명해주셨다.


  미로처럼 복잡한 가부키초의 골목들은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길을 잃기에 십상이며, 경찰의 도움을 받기도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니 꼭 큰길로만 다니고, 웬만해서는 이쪽으로 오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이곳은 도쿄 최대의 환락가이자 보이지 않는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뒷면의 세계인 것이다.     


  *


  문득 드라마로 더 유명한 만화 <심야식당>이 생각났다.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 영업하는 식당에는 가부키초에서 일하는 손님들이 자주 드나든다. 1권 첫 번째 에피소드의 손님도 야쿠자다. 위협적인 대사를 읊어대는 부하와 함께 가게로 들어서는 켄자키 류. 식당 내부가 불안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는 순간, 그가 입을 연다. 비엔나소세지 있나? 빨간 비엔나소세지.


  어쩌면 맥이 풀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비엔나소세지라니, 선글라스를 쓴 험상궂은 야쿠자의 주문이 비엔나소세지 볶음이라니.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도 당황스럽지만, 주문을 받은 가게 주인 ‘마스터’의 대답 또한 걸작이다. 있어, 문어 모양으로 볶아줄까?


  심야식당은 그런 곳이다. 야쿠자가 문어 모양으로 자른 비엔나소세지 볶음을 주문할 수 있는 곳. 누구나 차별 없이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곳. 그 따스함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일까. 그곳에서는 AV 배우나 스트리퍼, 윤락업 종사자 등 사회의 어두운 골목에서 살아가는 손님을 자주 만날 수 있다.     


도시의 밤은 너무 환해졌다. 이 거리는 어두컴컴한 게 매력인지, 흐릿한 불빛에 빨려 들어오듯이 사람들이 길을 잃고 들어온다. -‘심야식당’ 중     


  저녁을 다 먹은 우리는 이자카야 골목으로 유명한 오모이데요코초에서 2차를 하기로 했다. J의 아버지는 가부키초를 빠져나올 때부터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시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낡은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처음 일본에 오셨을 때 생활하시던 숙소였다고 했다.


  30여 년의 시간을 넘어 온 신주쿠의 밤거리에서, J의 아버지는 무작정 도쿄로 넘어와 정착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빠칭코에서 일하면서 숙소로 돌아와 일본어를 공부했던 시간들. 많이 울고, 억울하기도 했던 기억들. 우리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J의 아버지도 한때는 이 도시의 일부였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는 말이지, 처음 도쿄에 왔을 때 꼬치 집에서 술 한잔해보는 게 소원이었어. 그런데 항상 바로 앞까지 가서 다시 돌아오고는 했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본어로 제대로 주문하지 못하는 게 겁이 났거든. 정작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말이야. 젊을 때는 겁이 없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아주 사소한 것들에 불안해하기도 하지. 그럴 때 이런 이야기가 너희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면 좋겠구나.     


  *


  오래된 꼬치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오모이데요코초는 관광객은 물론, 현지의 직장인들이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곳이라고 했다. 누군가의 여행지엔 누군가의 삶이 있다. 섞여 들어갈 순 있어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걸까?


  그러고 보니 심야식당의 배경도 신주쿠의 어딘가라고 했다. 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각자 남에게 말 못 한 사연들이 있겠지. 마음의 그릇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무언가를 담아둘 수 없을 때가 되면, 그들도 어딘가에 있는 심야식당을 찾아가는 걸까. 추억이 담긴 음식과 한 잔의 술에 위로받으며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걸까.


  그렇다면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은 심야식당에 어울리는 손님이 아닐 것이다. 아쉽지만 그곳은 이 거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장소로 남겨놓자. 하루의 무게를 온전하게 이겨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맞이해주는 곳으로. 젊은 시절 J의 아버지도 그곳에서 마음 편히 술 한잔하실 수 있다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멈춘 기계의 맞은편, 업무의 뒤편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