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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Jun 22. 2020

그때는 꿈 같은 거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

세상이 바뀌었으니까,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아야지

  내가 학교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항상 맥주를 사 왔다. 안주는 그때그때 달랐는데, 만두나 부추전을 구울 때도 있었고, 롯데 자이언츠가 순위 결정전을 하는 날에는 치킨을 시키기도 했다. 물론 그런 날은 치킨집 주문이 한참 밀려서 4회나 5회를 지나야 겨우 배달이 왔다.


  아버지는 맥주잔을 하나만 가져와서, 자기가 마신 후에 묵묵히 다시 채웠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건 내 몫이었다. 내가 다 마시면 다시 아버지가, 아버지가 다 마시면 다시 내가. 그렇게 우리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하나의 맥주잔을 주고받았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일찍 사회로 나가야 하는 막내아들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주도(酒道)를 가르쳤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야구 중계가 끝나도 치킨과 맥주는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TV에는 당일 경기의 하이라이트가 반복해서 나왔다. 학교는 다닐 만하나? 완전 적성이죠. 니가 손재주는 아빠를 닮아서 다행이네. 롯데가 이겨 기분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술기운 때문인지, 아버지는 평소에는 하지 않는 젊은 시절 이야기를 했다.


  고등학교 대신 갔던 직업훈련원 이야기, 커다란 목공소의 공무팀으로 일했던 이야기, 부산으로 돌아와 유통회사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났던 이야기. 아버지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이스터 고등학교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만큼은 기계나 전기, 전자나 설계를 배우던 일이 하나도 원망스럽지 않았다.     

  *     


  아마도 경험이 매개체가 되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지나온 시간을 통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을 처음 봤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전쟁의 기억, 상실된 가족의 상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세상풍파를 직접 겪은 적은 없었지만,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와 나의 경험이 긴밀하게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없으면 장남인 네가 가장인 거 알제? 가족들 잘 지키라.”     

  <국제시장>은 한국전쟁 당시 흥남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가족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피난 도중 자신의 등에 업혀있던 동생 막순이를 잃어버리고, 설상가상으로 딸을 찾기 위해 배에서 내린 아버지와도 생이별하게 된 사내아이 덕수. 남아있는 가족들은 고모의 가게 ‘꽃분이네’에서 만나자는 아버지의 말을 가슴에 간직한 채 타지에서의 생활에 적응해간다.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덕수는 돈을 벌면서도 검정고시 학원 수업을 몰래 들으며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에게는 외항선 선장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공부를 이어가던 동생 승규가 먼저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면서 덕수는 고민에 빠진다. 당장에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던 그는 결국 친구 달수와 함께 파독 광부모집에 지원하고, 체력검사와 면접을 통과하면서 3년간 독일로 떠난다.     


 "Glück auf(살아서 만납시다)!"     


  굳게 마음먹고 결정한 일이었지만, 매일같이 이어지는 작업은 가혹하기만 하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 1000m의 광산. 온몸을 새까맣게 뒤덮은 석탄재는 마음까지 어두운색으로 물들일 것만 같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는 중노동 속에서도 덕수는 일상을 살아간다. 쉬는 날에는 자전거로 강변을 달리기도 하고, 독일에서 평생의 동반자인 ‘영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     


  맥주를 다 마시자 아버지는 냉장고에 있는 소주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는 차갑게 식은 초록병 두 개와 소주잔 하나를 가지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다시 같은 방식으로 잔을 주고받았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이야기는 점점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조차 안 난다는 아버지의 아버지. 돌아가며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던 여섯 남매. 가끔은 모두를 고생시킨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고, 별 의미 없이 흐르는 TV 광고를 보며 아버지는 말했다.     


“맨날 당신 팔자가 이러니 이해해라, 팔자가 이러니 어쩔 수 없다, 당신 팔자가 어때서요? 이제는 남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한 번 살아보라고요! 당신 인생인데 왜 그 안에 당신은 없냐구요…….”     


  3년 뒤 한국으로 돌아온 덕수는 영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못다 한 공부를 이어간 끝에 해양대학교에 합격한다. 나이 든 고모는 ‘꽃분이네’를 덕수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한다. 이제는 정말 힘든 시절이 다 지나 행복한 나날이 다가올 것만 같다. 하지만 고난은 덕수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고모가 죽자, 알코올 의존증인 고모부가 ‘꽃분이네’를 팔아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덕수에게 ‘꽃분이네’는 단순히 낡은 가게가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실종된 동생과 아버지가 돌아와야 할 공간이다. 그에게 ‘꽃분이네’는 지켜야 할 기억인 동시에, 가족이 살아있을 거라는 믿음인 것이다. 결국 덕수는 선장의 꿈을 포기한 채 가게를 인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부족한 돈을 메우기 위해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에 기술자로 지원하며 다시 한 번 조국을 떠난다.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고."     


  총알과 포탄이 날아드는 전쟁터에서도 덕수는 간신히 살아 돌아오지만, 그 과정에서 한쪽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게 된다. 자신에게 안겨 흐느끼는 영자에게 담담히 괜찮다, 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세월의 주름만이 무심히 베여있을 뿐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지켜낸 ‘꽃분이네’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 노력에 하늘도 감복해서일까, 전국으로 퍼지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덕수는 어릴 적 잃어버렸던 동생 막순이와 재회하게 된다. 해외 가정으로 입양된 막순이는 과거의 기억을 대부분은 잊어버렸지만, 덕수와 마지막 순간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마침내 서로를 확인한다. 그들은 울고, 또 운다. 살아있어 다행이라며 울고,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며 운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덕수는 방에서 혼자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사진을 안고 눈물을 흘린다. 기억을 지켜내는 일도, 굳은 믿음으로 기억을 긍정하는 일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건 없었다. 아버지는 그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영화를 좋아하셔서 주말 아침이면 혼자서라도 극장에서 가시는 아버지가 <국제시장>을 안 봤을 리 없는데.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삶을 상상해보셨을지. 아니면 자신의 경험에 덕수를 겹쳐보며 문득 우울해지셨을지. 직접 물어볼까 싶었지만, 나는 이내 단념하고 호기심을 소주잔에 털어 삼켜버렸다.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거겠지. 그건 당신의 마음이니까. 누군가의 아들이나, 누군가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삶을 굳세게 살아낸 온전한 당신의 이야기니까.


  *


  아빠는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꿈이 없었지, 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래도 하나 정도는 있잖아요. 아빠가…… 사실 축구를 좀 하긴 했지. 아아 운동선수 체질은 아닌데. 니네가 못 봐서 그렇지. 아빠. 왜. 저는 글을 쓸 거에요. 그건 네 엄마 닮았네. 아버지는 근처에 두었던 담배와 라이터를 찾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한마디를 보탰다. 세상이 바뀌었으니까.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아야지.


  몇 잔째인지 모를 소주에 정신이 몽롱해져서일까. 현관으로 나서는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기억을 지켜내고, 기억을 긍정하고, 마침내 기억에 바깥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을 텐데. 당신은 내가 밉지 않을까. 질투가 나거나 부럽지 않을까. 왜 당신에게는 나만큼의 사랑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지 억울하고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차마 물어볼 용기가 없던 나는, 자꾸 뜨거워지는 눈시울만 말없이 닦아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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