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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Jun 15. 2020

정말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회사를 옮겨도, 이 세상 어디를 가도, 괴로움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잘 지내고 있니.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어느새 네가 한국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네. 필리핀은 어때? 주변의 풍경이나, 하늘의 색깔이나, 들이마시는 공기는 어때? 사람들은 어떤 표정으로 웃고, 즐거울 땐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어? 너는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6개월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니까, 천천히 고민하고 다음을 생각하면 좋겠어. 아직 불확실한 미래도 분명 더 많은 가능성으로 빛날 테니까. 기회가 있다면 자신 있게 손을 뻗어야 해.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 굳게 먹고 행복해지는 거야. 너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자격뿐만 아니라 능력도, 분명 네 안에 가지고 있으니까.


   나에게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 회사도 그만두고, 혼자 생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덕분에 이제야 차분하게 너를 그리워할 시간이 생긴 것 같아. 여기는 벚꽃이 떨어지고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오고 있어. 비가 올 때마다 점점 습한 바람이 불어와 주변의 색을 진하게 만드는 기분이야.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함께 지나왔던 여름이 떠오르기도 해.     


   *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네.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카페 창문 너머로, 투명하게 쏟아지던 햇살. 우리는 스물이었고, 또 하나의 여름을 넘어가고 있었어. 아이스커피가 담긴 잔에 물방울이 맺히고, 중력을 이기지 못해 떨어져 테이블에 생긴 자국이 점차 마를 때까지, 나는 몇 시간이나 멍하니 창문 밖 거리를 바라보고는 했지.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거든.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지? 학교에 있을 때는 그렇게나 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는데, 어른이 되자마자 모든 게 텅 비어버린 거야. 누구도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뭘 더 할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잖아. 마치 세상이 우리를 잊어버린 것만 같았지. 아니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 너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끝났어. 이제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아, 라고.


   나는 묻고 싶었어. 다들 이런 시간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정말로 그냥 사는 걸까? 삶은 계속 이어지는데, 생각은 뚝 하고 끊어져 우리를 황당하게 했어. 더 이상 들어야 하는 수업도, 해야만 하는 숙제도. 동아리도, 학생회도, 직접 만들기도 했던 토론회도 없었지. 대신 일이 있었어. 땀 흘려 일하고 대가를 받는 노동이 있었지. 그게 싫지 않았는데, 그것만 해도 괜찮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어. 가만히 있으면 세상이 우리를 게으름뱅이 취급하는 것 같았지.


   그래서 방송대학교 원서를 넣고, 일본어 학원을 등록하고, 독서모임을 가고, 혼자 새벽까지 책을 읽다가, 결국에는 다시 글을 쓰게 됐어. 하지만 그건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의 이야기니까. 스무 살 여름에는 멍하니 있는 것밖에 할 게 없었지. 혼자 있는 게 적적해서 매번 너를 불렀어. 그러면 너는, 소중한 주말 오후를 희생해서 그 여름의 풍경을 더해주었어.     


   *


   언젠가 미안하다고 했던 말, 기억나? 그래서는 안 됐다고. 자신의 불안이나 걱정 때문에 너의 시간을 빼앗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고. 너는 자신도 느긋하게 있을 수 있어 좋았다며 웃었지만, 사실은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 나를 지켜주었던 거였어. 그 여름을 가로지르며 너는, 분명 나를 구했어.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너는 회사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힘들어했어. 아침에 일을 시작해서 새벽에 퇴근하기도 한다고. 월급 명세서를 받았을 때 잔업이 200시간이 찍혀있었다면서, 최저임금으로 월급을 300 가까이 받는다고 농담처럼 말했지.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어. 네가 버텨낸 삶이 농담일 리 없었으니까.


   나는 그만두라고 말했지. 충분히 다른 회사로 옮길 수 있을 거라고. 너는 어디를 가도 환영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어. 일반 노동자가 아니었으니까. 군 복무를 대신해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산업기능요원이었으니까. 회사에서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것도 퇴사나 이직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


   날씨가 추워지면서 너를 만나는 일이 점점 쉽지 않아졌어. 너는 주말에도 일을 하고, 휴일이 불규칙하게 변했지. 가끔 연락이 닿아도 집에서 나오기 싫어했어. 충분히 쉬지 않으면 회사에서 버티기 힘들 테니까. 주변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너를 묶어두고 있는 것 같았어.


   다른 회사에 면접까지 봤지만 결국 무산됐다고 했지. 산업기능요원 이직에 필요한 서류나 절차를 부담스러워했다고. 네가 직접 알아보고 괜찮다고 했지만 결국 옮기지 못했다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점차 힘을 잃어갔어. 연말에 겨우 시간을 내서 우리가 만났을 때, 너는 분명 지쳐있었지.


   가족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정도는 버티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을 들었다며 한숨을 쉬었어. 그리고 나에게 물었지. 정말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버티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걸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섬뜩한 기분이었지. 회사를 옮겨도, 시간이 지나도, 이 세상 어디를 가도 괴로움은 끝나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언이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다니고 있었던 거야.     


   *


   너의 표정이 밝아진 건 겨울이 끝날 무렵이었지. 그리고 신기한 우연이 겹쳐서, 너는 내가 다니던 회사로 오게 되었어.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소식에 인사과 과장님에게 네 이야기를 했지. 사실 나도 별 기대는 안 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긍정적이었어. 자소서랑 이력서를 받아보고 금세 면접까지 봤지. 그리고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이직이 결정됐어.


   너는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아. 너를 구한 건 언제나 너 자신이었어. 퇴근 후 졸음을 참으면서 회사를 알아본 것도, 불안한 마음으로 병무청에 몇 번이나 전화한 것도, 연차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닌 것도,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일어나 출근했던 것도, 전부 너였어. 나는 너를 둘러싼 우연들 중 하나였을 뿐,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어.


   여전히 나에게는 죄책감이 남아. 너는 얼마든지 더 큰 일을 당할 수도 있었어. 몸과 마음은 지쳐있었고, 업무의 강도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지.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쉽게 말하고, 무엇하나 자신의 것을 내어주지 않았어. 네가 가혹한 겨울을 홀로 걸어가는 걸 바라볼 뿐이었지. 그 여름의 반짝임 중 어느 것도 너에게 되돌려주지 못했던 거야.     


   *


   나는 가끔,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는 게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뭐랄까.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너무 많이 겪은 것 같아. 누군가 가르쳐주었다면 덜 아플 수 있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배운 것도 있지만, 절대 좋은 일은 아니었을 거야. 그걸 애써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드리는 법도 우리가 배워야 할 일 중 하나일 거야.


   이 편지가 끝나면 여름이 한 걸음 더 다가오겠지. 카페에서 몇 시간이나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처럼. 하지만 이제는 바라만 보던 풍경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거야. 진한 색채로 빛나는 거리를 걷다 보면 금세 땀이 흐르겠지. 숨이 차고, 힘이 들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간이 그립기도 할 거야.


   그래도 걷다 보면, 꿋꿋하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겨울에 머물러 있는 불길한 예언도 우리를 쫓아오지 못할 거야. 투명하고 밝은 햇살 아래 모두 녹아버릴 거야. 혹시라도 남아있는 그림자가 발목을 잡으면, 그때는 내가 반짝임을 전해줄게. 필리핀이든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먼 곳에 있어도 분명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어. 못다 한 이야기는 만나는 날을 위해 남겨둘게. 그동안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면 좋겠어. 언제나 건강하게 웃으며 지낼 수 있기를 바라. 그럼 이만, 안녕.     


   여름을 기다리며, 허태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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