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열차 마지막 탑승객
고1, 고2 때부터 쭉 이어져 내려온 친구들이 있다. 당시 반장을 했던 친구들인데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희로애락을 공유하면서 우리의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문과 셋, 이과 셋이었다. 대학도 서울, 진주, 통영, 부산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취업도 부산 외 다른 지역에 취직하면서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이 인연이 오래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도 놀라곤 했다. 역시나 이과 출신 친구들의 취업이 빨랐다. 이과 출신인 만큼 전공도 기계, 임상병리, 건축 등 전공도 다양했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순서대로 취업 소식이 들렸다. 반면 문과생 3명은 취업하기 어렵다는 법학, 교육학, 사학이었고 우리의 취업이 늦어진 만큼 이과생들의 취업턱은 취업턱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취업을 일찍, 잘한 죄로 매번 만날 때마다 계산하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문송합니다’라는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문과생들은 자연히 취업이 늦었고 참 당연하게도 셋 모두 공시생, 고시생이었다. 공무원, 교육행정직 그리고 임용.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없는 시험이라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3년이 되고 있었다. 공부한다는 이유로 만나기도 어려웠다. 문과생 셋이 한창 공부할 때는 1년에 한 번 겨우 만날까였다. 공무원을 준비하던 친구 A가 2년째 되던 해 서울에서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고시든 공시든 공부를 함께 했던 입장에서 친구의 먼저 전해진 합격 소식이 너무 반가웠고, 그해 나는 경기도로 임용을 응시했던 터라 잠깐이지만 우리 꼭 함께 윗지방에 살아보자며 서울과 경기 생활을 꿈꾸기도 했다. 다른 문과생 친구 B는 처음에는 영어 임용을 준비하다 교육행정직으로 진로를 바꿔 새로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함께 임용을 공부할 때에는 과목은 달랐지만 동지라는 생각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고민도 공유하곤 했는데 교육행정직으로 직렬을 변경한 후에는 이 역시 어려워졌다. 그래도 때로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하고 여러 고민을 나누었다. B는 2년째 되던 2019년 여름, 합격 소식을 전했다. B 역시 하루빨리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던 터라 B의 합격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축하해... ! 고생했어..!”
나만큼 오래 공부했던 친구라 부러우면서도 아직 겪어보지 않은 기쁨이지만, 그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아 더욱 축하했다. 연락처에서 B의 전화번호를 찾는 동안 한편으로는 ‘나만 남았구나’라는 마음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추로 마음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역시 내가 제일 마지막일 것 같더라니’라는 후련함도 들었다. 함께한 지 10년이 지난 만큼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알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마지막이어도 좋다라는 생각이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마음을 고쳐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부러움과 내려놓음이 공존했다. 솔직히 내 머릿속을 가장 많이 채운 생각은 바로 ‘내가 공부 제일 오래 했는데... 왜 나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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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과생 세 명은 취업도 빨랐고,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언니들이었다. 친구 C는 늘 전화해 ‘어딘데, 나온나’라고 시작했다. 쾌활한 성격만큼 공대 출신의 어엿한 대리님이었다. ‘나 공부하지’라는 말은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었다. ‘공부는 맨날 한다이가 나온나.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라는 말에 11시까지 할 공부를 9시에 접고 서면으로 나선 적도 있었다. 도서관 복장이라 후줄근한 추리닝에 도시락이 담긴 백팩을 매고, 안경을 쓴 채 서면으로 나갔다. 핫하다는 술집에서 권하는 술도 얼마나 튕겼는지 모른다. ‘내일 공부해야해서..’라고 말했고. ‘한 잔만 마셔라’라는 말에도 한 잔을 얼마나 나누어 마셨는지. 하지만 그런 걱정 겸 잔소리들은 하나도 서운할 것들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1차는 자연히 직장인들이 계산하는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미안할 뿐이었다. 술 먹자는 말에도, 술 한잔에도 그렇게나 튕겨댔는데도 여전히 전화해 ‘어딘데, 공부하나’ 라고 말하는 친구 C 였다.
가장 취업이 빨랐던 D는 휴학 한 번 한 적 없고, 대학생 때에도 실습실에서만 살던 친구였다. 치열하게 산 만큼 취업 역시 제일 빨랐고 아마 돈도 제일 많이 썼을 테다. D는 기억도 못할 테지만 만나서 실컷 놀고 돌아가는 길에 D에게 만 원을 갚아야 했다. 그 당시에 돈이 없어 나중에 갚는다고 한 것이 지금이 되었다. 직장이 부산인지라 가장 자주 본 D는 자연히 늘 계산을 했고, 늘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됐다, 보람아. 내가 살게. 다음에 사라’
E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대전으로 취업을 하게 되면서 더욱이 만나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서로가 서로에게 잊혀질 때쯤 꼭 한 번씩 전화가 와 수다를 떨곤 했다. 보통 공부가 끝나고 도서관을 나서 집까지 걸어가기까지 15분이 걸렸는데, 통화는 15분을 훌쩍 넘고도 삼십 분 간의 통화가 이루어졌다. 어떻게 지내는지,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건너 듣기도 했다. 그렇게 두세 달에 한 번씩 해주는 전화는 되레 고마웠다. 딱히 내가 하는 이야기보다 D의 이야기가 더 많았지만, 그래서 때로 빨리 끊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전화 한 통으로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여전히 나를 응원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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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동안 친구들의 부모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직장인 친구들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도, 약속을 미루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런 소식은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들이었다. 어느 것도 쉽게 위로가 되지 않을 테지만 재정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다른 친구들만큼의 여유가 없다는 현실이 내가 공부하고 있는 이 현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하는 순간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밤을 새우며 함께 해주고 싶었고, 몇 번이고 전화해 만나자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내일도 모레도 공부해야 하는 불투명한 미래를 살고있는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의 상황을 알고 이해해주고,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친구들은 나에게 늘 미안함과 고마움의 대상이었다.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때에도 매번 만날 때마다 세상 공부 혼자 다 하냐며, 그렇기 때문이라도 니가 될수 밖에 없다고 볼멘소리와 응원과 위로가 뒤섞인 농담으로도 서운하기보다는 그래서 더 고마운 내 친구들이었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쌓일수록, 내가 불확실해 하고 불안해할수록 나보다 더욱 내 미래를 확신하는 친구들 덕에 그래도 한 번 더 책을 펼치고, 펜을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