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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Aug 13. 2020

행복이든 꿈이든 모두 개똥 같은 소리였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스물다섯. 남들은 늦었다고 생각하는 대학교 4학년을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모여 고등학생, 중학생들을 찾아가 그 시절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을 강연을 통해 들려주는 봉사활동 동아리였다. 이 활동은 1년간의 타국생활과 카미노 여정의 종착점이었다.       


  카미노 길을 걷고 온 사람들에게는 종종 카미노 병이 나타난다. 이 증상은 군대를 막 전역한 민간인의 느낌과 비슷한데,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고 예수님, 부처님처럼 세상 깨달음은 다 깨달은 것처럼 행동한다. 나 역시 그랬다. 아니 좀 심각했던 것 같다. 30일간의 고행 속에서 깨달은 것들을 나만 알고 있을 수 없었다. 하루빨리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계속해서 되뇌었던 것은 ‘살아있자. 행복하게 살자.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였고, 귀국하자마자 학창 시절부터 써 내려간 버킷리스트를 펼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중 ‘모교에서 강연하기’를 발견했고, 이것이야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깨달음과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십 대에게 그런 자리는 가당치나 않은 일이다. 특히나 모교에서 강연을 할 정도라면 사법고시를 합격하거나(학창 시절 사법고시 합격하신 선배가 오셨다.) 사회에서의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분들인데, 이렇게 되기까지 기다리기에는 이미 퍼질 때로 퍼진 카미노 병이 그때를 기다려주지 못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검색을 하던 중에 이 동아리를 찾아내었다. 고등학생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니! 내가 느낀 것들을 말해줄 수 있다니! 딱이었다. 1년 6개월의 활동 기간이 대학교 3~4학년이었던 나에게 너무 늦은 것 같았지만, 30일 800km도 걸었는데 그것 못할까 하는 마음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했다. 삼십일 동안 걸으면서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살아있네! 우와 살아있네!’였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좀 다르다. 사람들은 보통 살아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하루를 살아내고,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 순간에, 다시 말해 이렇게 까미노 길을 걷다 보니 진짜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달까. 말이 어렵다. 그런데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순간 단전에서부터 와 사롸있네 가 절로 외쳐졌다. 행복을 느끼게 된 순간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살아있음을 늘 의식하고 그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이 길이 내게 전해준 깨달음이었다. 이를 전해주고 싶었다.      


  두 번째는 꿈에 관한 것이었다. 꿈은 단수형 명사가 아닌 복수형 명사다. 그러니 장래 희망만이 아닌 많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면서 살면 지금 삭막한 고등학교 시절이라고 해도 버킷리스트, 즉 꿈을 만들고, 그 꿈을 하나씩 지워가자 였다. 하고 싶어 했던 꿈을 이루면 행복해질 테고 그러면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랬다. 학창 시절부터 써 내려간 버킷리스트에는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까지 모두 있었다. 헌혈하기, 나만의 사진첩 만들기, 22번 버스 타고 산복도로 타기. 산복도로 야경이 끝내준다. 이런 소소한 것들도 생각해보니 버킷리스트가 아닌 꿈이었고, 그 꿈 이루면서 소소한 행복들을 느낄 수 있었다.     


   *


  모두 개똥 같은 소리였다. 지난 4년간 수험생활을 하면서 내가 뱉은 말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말인지 느꼈다.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날은 몇 없었다. 행복을 찾아, 있던 꿈들(버킷리스트들)을 지워나갈 마음의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저 아이들에게 말했던 헌혈이나 가끔 하는 정도랄까.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2년은 여전히 꿈 타령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뱉은 말이 있으니 무작정 괴로워하며 공부만 할 수는 없었다. 필름카메라 어플을 이용해서 10시간씩 공부를 하던 와중의 한 장면 장면을 담기 시작했고, 한 달에 한 권의 책 읽기도 가능했다. 교회 가는 길 돌아가는 22번 버스를 타면서 그때의 행복감을 다시 느껴보기도 했다. 

 

   *


  3년 차 4년 차가 되던 해에는 계속된 낙방으로 더 이상 버킷리스트를 꺼내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버킷리스트들을 생각하면 무엇 하나 해내고 있지 않은 내가 실망스럽고, 미워졌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6일 공부하고 하루, 반나절 쉴 때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널브러졌다. 숨 쉬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내가 아이들에게 전했던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살았다. ‘아 아무것도 하기 싫다. 살면 뭐 하나. 이렇게 살기 싫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록 갈수록 더욱더 절망에 빠졌고, 버킷리스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붙을 것 같았던 네 번째 시험에서도 낙방하면서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무기력함과 낮은 자존감들이 나를 갉아먹고 있을 때, 내 꿈들, 버킷리스트가 희미해질 무렵 5번째 시험을 위해 책 정리와 방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내 눈에 들어오게 된 내 꿈의 목록들. 펼쳐볼까 말까, 보기 싫은 마음과 다시 보고 싶은 마음들이 공존했다. 기어코 다시 그 공책을 펼쳤다. 


   1. 교사 되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오랜 꿈. 5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나의 첫 번째 꿈. 이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3년, 4년을 달리고 있는 현재. 나는 목록 속 많고 많은 꿈들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꿈들도 중요하지만, 그중 가장 첫 번째를 이루기 위해 다른 꿈들을 잠시 미뤄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의 시간들은 더 이상 헛된 것이 아니었고, 내가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1번에게 내 시간을 잠시 양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공책 한 번 펼쳐보는 것으로 생각은 정리되었다. 이 정도면 다시 한 번 달릴 힘이 충전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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