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무경력자의 처음이 생겼다
계속된 실패로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더군다나 직전 해 사립에서의 최종합격 실패 경험으로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부정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나이 먹도록 기간제 경험 없이 공부만 했던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고,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지 않고 1년의 휴학과 1년의 해외 생활까지 후회하고 있었다. 사립에서의 불합격도 불합격이지만 0.2점 차로 공립 1차에서 아깝게 떨어진 현실도 직면하게 되면서 그렇게 2019년 2월 한 달은 힘겨운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2019년, 스물아홉이었다. 2018년은 내가 생각했던 마지막 임용시험이었다. 이제는 무슨 결정이든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되기 위한 이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맞는지, 그래도 조금 더 많이 뽑고 객관식으로 시험을 치는 공무원으로 바꾸어야 하는지, 진정 선생님이 내가 원하는 길인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기 위해 더욱이 선생님이 되어볼 필요가 있아ᅠ갔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기간제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1년짜리 기간제도 경력이 최우선이라고 하니 시간강사며 단기 기간제며 닥치는 대로 넣어보기 시작했다. 몇 군데를 넣어보았지만 경력이 없는 나에게 연락 오는 곳은 없었다. 어영부영 3월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다섯 번째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한 학기 기간제가 다 뽑히고 난 3월 중순, 부산의 한 여고에서 4개월짜리 기간제 공고가 떴다. 4월부터 8월까지. 임용 도전을 계속한다고 해도 상반기에 일하면서 공부하고, 하반기에 올인하면 딱 좋은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4개월 동안 아이들과 부딪히면서 진정 선생님이 되고 싶은지,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막상 해보니 내 성격과 맞지 않아 후회 없이 뒤돌아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런저런 마음으로 자기소개서와 생활기록부 등을 제출했다. 지금의 좌절감, 낮은 자존감들을 리셋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는 만큼 간절하게 바라면서도 앞선 사립에서의 뼈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무경력자로서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학기가 시작된 후라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질 않았는지 운 좋게도 서류 합격을 했고 면접 일정이 잡혔다. 면접을 앞두고 이십 분쯤 일찍 도착해서 학교를 둘러보았다. 대기실에 놓인 학교를 소개하는 파일들을 슬쩍 읽어보며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면접을 볼 선생님들과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연륜이 있으신 인자하신 선생님과 나처럼 젊지만 나보다 경험이 많아 보이는 선생님이셨다. 무경력자인 만큼 이미 경력에서는 뒤졌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래도 짧은 4개월인 만큼 무경력자도 뽑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와 이미 학기가 시작한 후의 4개월인 만큼 경력자를 뽑지 않을까라는 아쉬움 섞인 한숨이 섞여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면접관이셨던 선생님들도 지원 학교에 관한 질문을 짧게 하신 후 역시 경력이 없냐고 물으셨다. 그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딱 하나였다. 4년째 공부 중이라는 사실. 그래도 작년에 아쉽게 떨어졌다고 덧붙이는 것이야말로 경력은 없지만 나 능력 있고,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할 뿐이었다. 큰 기대 없이 마음을 편하게 먹어서인지 면접을 보는 동안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지원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과목이 한국사도 있지만 세계사가 있다는 사실이 한국사만 가르치셨을지도 모르는 연륜이 있는 선생님과 달리 4년째 공부만 하고있는 나에게 큰 장점이 될 것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추후에 합격자에게 따로 연락이 주신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고, 출발한 지 여섯 정거장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겠냐는 합격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무경력자의 처음이 생겼다.
4개월 동안 타국으로 파견 근무를 가시는 선생님을 대신해서 4개월간의 경력이 생기게 된 순간이었다. 사립에서 떨어졌던 순간, 무수히 많은 기간제 지원서와 자기소개서가 버려졌을 순간을 떠올리며 기간제 20년 차든 3년 차든 경력자들에게도 늘 처음은 있었을 텐데. 교장, 교감, 부장선생님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왜 다들 처음부터 경력자만을 바라는 걸까. 모르겠다.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그간의 나의 노력들이 적어도 경험이라는 잣대에 무시되지 않고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욱 처음이라고 어설프지 않게 100, 200만큼 더 노력할 준비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