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밀밭 Nov 06. 2020

네? 저녁이 아니라 아침 8시 30분요?

‘우리 독서모임 한번 해볼래?’

   ‘토요일 저녁 8시 30분이라 하셨죠? 네? 저녁이 아니라 아침 8시 30분요? 아, 알겠습니다. 그날 뵙겠습니다.’


   대학생 시절 몸담았던 동아리의 운영진을 맡았을 때였다. 신입회원 모집을 열심히 하고 싶었다.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의견을 모았고, 취직한 선배님들의 추천사 영상을 만들어서 홍보에 활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한 분씩 연락을 드렸고, 직장으로 찾아뵙거나, 점심을 함께 하면서 간단한 영상 촬영을 진행했다. 그러다 한 선배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토요일 아침 8시 30분, 서면 던킨도너츠 2층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설마 내가 잘 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정말 저녁이 아닌 아침 8시 30분이었다. 세상에, 주말 아침에 약속이라니. 이건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 혹시라도 약속 시각에 늦을까 봐 전날 밤부터 알 수 없는 긴장까지 할 정도였다.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주말 아침, 서면이라는 공간에 발을 딛게 되었다.


   30분 일찍 약속 장소로 나갔다. 토요일 아침 8시, 부산의 가장 번화가인 서면 거리는 낯설었다. 인파로 가득했을 밤거리는 아침 일찍부터 청소를 시작하신 환경미화원의 노동 장소로 변해있었고, 아직도 뜨거운 밤의 열기를 채 식히지 못한 청춘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택시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러 가는 모습도 드문드문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제정신으로, 그 시간에, 서면의 거리에 존재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밤 문화에 익숙지 않았기에, 괜히 내가 끼어들어 끝나지 않은 금요일 끝자락에 균열을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있어선 안 되는 곳에 있는 것만 같은 어색함 때문이었을까. 괜히 입고 있던 옷을 다시 한번 여미고 던킨도너츠 2층으로 올라갔다. 그 순간, 선배는 9시부터 그곳에서 다른 약속이 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 추천사 영상 촬영을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마친 뒤, 그 시간에, 서면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였으니깐. 선배는 약속시각에 맞춰 나왔고, 우리는 목표로 했던 영상 촬영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다. 이제 할 일도 없으니 집으로 돌아간다면, 어쩌면 그 어느 날보다 완벽한 하루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9시부터 우리 독서모임 하는데, 시간 괜찮으면 한 번 참여해볼래?’


   선배의 한 마디가, 나의 상상 속에 펼쳐지던 완벽한 하루라는 찰나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때는 몰랐다. 그 한 마디가 하루의 틈새가 아닌 내 인생의 틈새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선배들에게 이쁨받고 싶어 했던 나는 ‘뒤에 약속도 없으니 당연히 선배님의 권유니깐 참여해야지’라는 맘이었지만, 선배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또 다른 나는 ‘책이라고는 군대에서 읽었던 『칼의 노래』 한 권이 전부인 너가, 그곳에서 무슨 망신을 당하고 싶어서 참여하니?’ 라며 저울질을 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함께 독서모임을 하는 다른 분들이 오기 시작했고, 나의 주위는 이내 사람들로 둘러싸이고 말았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을 놓쳐버린 나는, 얼떨결에 생전 처음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해진 책이 있는 모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배도 편하게 참여를 권유했었던 것 같다. 요즘에 읽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이 꼭 한 번 읽어 봤으면 하는 책들을 한 권씩 소개하였고, 관심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신의 경험을 전하거나, 책의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전공지식을 덧붙여서 새로운 해석을 펼치거나, 몇몇 질문에는 주장과 반박이 오가는 짧은 토론이 이뤄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넋을 놓고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뇌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였다. 꿀 먹은 벙어리마냥 계속 앉아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편하게 나의 경험을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선배가 마련해줘서 대화에 참여 할 수 있었고, 다른 선배님들의 배려 속에 서서히 방관자가 아닌 한 명의 참가자로서 모임에 임할 수 있었다. 학교생활을 하며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적대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어 2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대화가 무르익어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별것 아닌 것마냥 편하게 얘기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봤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마냥 어색해보였지만, 딱 떨어지는 수트핏처럼 그 옷에 나의 몸을 완벽하게 맞춰보고 싶었다.


   2010년 2월 20일 (토) 오전 11시. 모임을 마친 뒤 거리로 나오자 서면의 거리는 아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바닥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설렘 가득한 하루를 시작하는 청춘들이 있었으며, 무엇을 할지, 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던 내가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 독서모임 한번 해볼래?’

매거진의 이전글 독서모임 진행자의 책 읽기는 달라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