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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Nov 20. 2020

왜 책을 읽냐고 내게 묻는다면,

당신의 삶 속에는 책이 빚어낸 우연한 사건이 있는지

2010년 3월,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봄날. 거리에 내려앉은 찬 공기를 밀치고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해주신 ‘구본형’ 선생님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동아리 운영진이었던 나는 신입회원 모집을 위해서 명사 초청강연회를 기획하게 되었다. 대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모임이었기에 예산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방에 있는 청년들을 위해서 꼭 한 번 와주세요’ 같은 상투적인 멘트로 재능기부를 요청했다. 어렵사리 뵙고 싶은 분들의 홈페이지나 메일을 찾아서 정중하게 요청드렸지만 대부분 회신이 없거나, 설레는 맘으로 열어 본 ‘Re:’ 라는 답신에는 예의를 갖춘 거절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자본주의의 냉정한 현실 앞에서 청년의 열정은 무기력했다.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대학교 4학년이었기에 도서관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눈은 토익책을 향해있었지만, 머릿속은 더 늦기 전에 명사 초청강연회를 포기하고 새로운 기획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 채워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열심히 현실을 살아내는 청년들로 가득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채 4학년을 맞이한 내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때 메일함에 새로운 ‘Re:’가 적힌 회신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미 거절에 익숙해졌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품지 않을 순 없었기에 긴장되는 맘으로 답신을 클릭했다.      


‘강동훈 학생, 지금 조건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매력이 없어요. 어디에나 공짜는 없는 겁니다. 그걸 바래서도 안 돼요. 내가 거절할 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봤다. 거절인 듯 거절 아닌 아리송한 회신이었다. 대한민국 1세대 1인 기업가로 활동하시면서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 같은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많은 직장인의 멘토 역할을 해오신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소장님의 답신이었다.  이에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려보기로 했다. 단순히 ‘청년들을 위해서 한 번 와주세요’가 아닌 그가 와야만 하는 당위성이 필요했다. 운영진들과 함께 고민했고 그해 1월에 발생했던 ‘아이티 지진’ 피해를 돕기 위한 자선모금 행사를 굿네이버스와 연계하여 기획해서 연락을 드렸다. 그렇게 해당 프로그램의 메인 스피커로 구본형 소장님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강연이 확정된 뒤 구본형 소장님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더 와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메일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비즈니스를 할 학생들의 모임이라니 1개의 팁을 줄 테니 해결해 보시게.      

[기본 가정]

‘모든 비즈니스는 남아야 한다. 따라서 참가한 사람의 손해를 전제하거나 담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확보되지 않으면 오랫동안 파트너가 되기 어렵다’    
     
[적용 사례]

나는 한 번도 공짜로 강연해 준 적이 없다네. 아주 싸게 해준 적은 있지. 지금처럼. 노력과 땀과 선한 목적이 사람을 참여하게 하지. 그러나 ‘선한 목적’만으로는 자선이지 비즈니스가 아니야. 그대들은 선한 비즈니스 마인드를 키워야 하는 것이고. 나는 강연료가 무지 비싼 사람인데, 이제 아이티 행사에 내 강연료를 기부한 셈이네. 그러나 내 차비를 들여 부산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네. 사람을 불렀으면 차비는 줘야지.  안 그런가? 그리고 또 하나, 그대들의 행사의 keynote speaker 이니, 매우 창의적인 마음의 선물을 하나 받아야겠네. 열정의 대가로.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이때 깨달았다.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가장 쉬운 문제라는 걸. 아무리 고민을 해도 ‘창의적인 마음의 선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강연을 하루 앞둔 날이 되었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고, 하루의 스트레스를 잠시 잊고자 샤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이 강의를 개최하기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 ‘우리만 할 수 있는 강사소개’로 청중들에게 전한다면 이날의 만남이 더욱 의미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강연장에서 수많은 청중들에게 이 자리가 생기게 된 과정을 나누었고, 구본형 소장님도 눈을 감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으셨다. 특별한 강사 소개가 있었고, 그 뒤 참석한 100여 명의 청년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인재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모금 봉투에 담아 나눠줬고, 약 50만 원의 기부금을 굿네이버스에 전할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신 구본형 선생님은 참여한 청년들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젊음은 미리 늙지 않는 것」이라는 칼럼으로 쓰신 뒤 <월간중앙>에 기고해주셨다. 가장 중요한 젊음의 특성은 바로 '아주 많은 우연한 사건들' 속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용기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그렇게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우연한 사건에 노출되었고, 이날 찍은 하나의 점이 인생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쉽게도 이렇게 맺은 인연은 또 한 번의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간중간 메일을 통해서 개인적인 질문이나 근황에 대한 공유를 드리면 답신을 주시면서 다음 만남을 기약했지만, 구본형 소장님께서 2013년 4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어른이 나라는 개인에게 믿음을 보여준다는 건 그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나에겐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가능성이 가능으로 변하는 순간 숨겨져 있던 성장의 씨앗은 발아한다. 안 읽던 사람이 읽는 사람이 되는 기적과 같은 일의 시작이 언제였을까 생각해보면 이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연한 기회에 참여했던 독서모임의 경험과, 또 한 번의 우연이 만들어 낸 저자와의 만남은 책이 품고 있는 ‘발견과 연결의 힘’을 그대로 보여준다. 결국 내게 ‘책을 왜 읽느냐?’고 묻는다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책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답을 하고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일지라도 ‘저자’와 ‘독자’로 연결이 되는 순간 언제든지 자리를 함께하고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조심스레 물어보고 싶다. 당신의 삶 속에는 책이 빚어낸 우연한 사건이 있는지. 그 우연이 만들어 낸 변화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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