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책 속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땅 위에 있다
2014년, 29살. 느지막이 대학을 졸업했고, 2년간의 연애를 끝내고 결혼을 했으며,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는 것들을 한 해에 몰아서 경험을 했던, 말 그대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던 한 해였다. 어렸을 때 그려보았던 ‘서른’은 많은 것이 정돈되고 갖춰진 상태에서 커리어의 전문성을 쌓기 위해 일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급하게 추진하게 되면서 밥벌이를 위한 준비가 채 되지 않았던 나는,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서 학창 시절 준비했던 분야가 아닌, 부모님 회사에 들어가 건축자재를 현장에 납품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낯설었지만 이내 적응 할 수 있었다. 납품가는 현장만 바뀔 뿐 매일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피드백으로 바탕으로 더 나은 기획으로 나아갔던, 매일이 새로웠던 날들과는 정반대의 삶이었다.
내가 그리던 삶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에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대학생 시절 ‘내가 원하는 가슴 뛰는 삶을 살아내자’와 같은 이상주의자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냈기에,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이지만 절대 소리는 낼 수 없는 춤추는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가닿지 않는 이야기를 했을 뿐인 과거와 현재의 모순에 대한 혐오였다. 환경적 변화는 많았지만 나의 내면은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버팀목은 격주마다 아내와 함께했던 독서모임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며 영혼 없는 주장을 펼쳤지만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에 말은 힘이 없었다. 모임을 마치면 언제나 기운이 샘솟았던 과거와 달리 풀이 죽은 내게 아내는 언제나 맹목적일 정도로 믿음을 주었고, 다시 한 주를 버텨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탈은 일상이 될 수 없고, 예외는 규칙이 될 수 없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거래처 소장님, 설비 사장님들과도 소소한 농담도 할 줄 아는 여유까지 생긴 나는, 작업복을 입고 출근길을 나서는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어느 날 납품을 위해 들린 현장에서 채 굳지 않은 콘크리트를 실수로 밟았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버렸다. 어떻게 수습할 겨를도 없이 근처에서 작업을 하시던 설비 사장님께서 오시더니 한숨을 푹 쉬신 뒤 시멘트를 반죽해서 발자국을 메워 넣으셨다. 선명했던 발자국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콘크리트에 찍힌 발자국이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찍혀버린 발자국처럼 나는 실수로 이 일에 발을 들인 것은 아닐까.’, ‘반죽 된 시멘트에 이내 덮여 버린 발자국처럼, 나라는 사람이 더 희미하게 잊혀버리기 전에 빨리 다음 발자국을 내디디고 이곳을 떠나야 하는 건 아닐까.’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겨우 찾았던 심리적 안정은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했고, 유독 심하게 앓았던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한 부담감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그즈음이었다. 독서모임을 준비하다 우연히 김훈 작가의 대담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바뀌지 않는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걸까’ 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길을 본 적이 없다. 책 속에는 글자가 있다. 말의 구조물이 있는 거다. 지식은 있으나 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길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땅 위에 있는 거다. 나와 자식, 친구, 이웃 사이에 길이 있는 거다. 책 속에 길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길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있으나 마나다. 책 속에 있다는 길을 이 세상의 길로 끌어낼 수 있느냐, 내가 바뀔 수 있느냐가 문제다. 혹시 말을 잘못 알아듣고 김훈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쓰는 사람은, 정말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웃음)”
이 문단을 밑줄 그어가며 10번도 넘게 읽었다.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선명하게 이해 할 수 있었다. 길은 찾는 것(Find)이 아닌 만드는 것(Make)이었고, 만들어 낸 길에는 남을 설득시키기 위한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이면 충분했다. 그제야 풀리지 않던 퍼즐 조각이 한순간에 맞춰지는 것 같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이유와 의미를 찾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꾸준히 해왔던 독서모임에서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그 길이 아니다 싶으면 또 새로운 길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자 한결 맘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책과 함께 하는 30대를 보낸 뒤 40세에는 책과 관련된 업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나만의 길을 그린 뒤 서른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키워낸 독서모임은 생각보다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고, 예상보다 빠르게 사업화를 위한 구상까지 가능한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게다가 올해는 독서모임 커뮤니티를 운영했던 경험이 하나의 경력이 되어 새로운 일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책 한 권 읽지 않았던 내가 우연히 시작했던 독서모임이 내 삶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곤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