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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Dec 04. 2020

나는 유독 책 읽는 사람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다

 책은 사람을 연결해주고, 그 사람은 다른 책을 연결해주었다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했다. 학교생활이 그리웠기 때문에 휴식 없이 바로 복학을 했다. 전공은 수학이었고, 많은 선배가 금융권으로 취업했다. 동기들도 대부분 금융권 취업을 준비했기에 큰 고민 없이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해당 분야에 대한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한 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겨울방학이 되었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군대 선임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왠지 그를 꼭 만나야 할 것 같았다. 마침 과외를 하던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약속을 잡았다.      


  그와의 첫 만남은 군대에서였다. 자대 배치를 받은 지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다. 군기가 바짝 든 상태로 흙 묻은 전투화를 닦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옆에 앉더니 전투화를 닦으며 말을 걸었다. ‘너 부산 사람이라며?’ 한 달 선임이었고 자신도 부산 출신이라고 했다. 다른 고참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알 수 없는 친근함이 느껴졌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복도를 지나다 그가 혼자 내무실에 있는 걸 발견했다. 경제학도답게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낯설었다. 성인이 된 뒤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멋있어 보였다. 같은 부산 출신이라 편해서 그랬는지, 우린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특별했다. 세상에 대한 명확한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고, 근거로 다양한 책을 엮어서 얘기하는 능력이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동경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처럼 책을 기반으로 지식과 정보를 내뱉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자 입가엔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바로 진중문고로 달려갔고 가장 멋있어 보이는 제목의 책 한 권을 꺼냈다. 김훈의 <칼의 노래>였다. 아쉽게도 그 책은 내가 군대에서 읽은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지만, 나의 열정은 만개하지 못하고 쉽게 말라버렸다.      


  전역한 뒤 약 6개월 만에 다시 만난 자리였다. 그는 예전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명확한 계획이 있었고 실천 중이었다. 이야기에는 힘이 있었다. 반면에 나는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의 눈빛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군복을 입었을 때는 한 달 차이 나는 선임으로 볼 수 있었지만, 사회로 나오자 그와 나의 격차는 명확했다. 방향을 잡지 못 한 채 방황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나 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기 전 <죽은 열정에게 보내는 젊은 Googler의 편지>라는 책을 읽어 볼 것을 추천했다.     


  “너는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학교 밖에서 한 다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구글에 취업한 ‘김태원’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도움이 될 거야. 어차피 전공에는 크게 관심이 없지 않니?”     


 헤어진 뒤 바로 서점에 들렀고 다행히도 책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스펙은 토익점수나 공모전 수상 횟수, 학점 등 숫자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느냐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년 후 당신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그린 꿈을 향해 가장 씩씩하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열정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프롤로그에 나온 이야기들이다. 이 부분을 반복해서 계속 읽었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선배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책 속에 펼쳐지고 있는 학교 밖 생활, 이른바 ‘대외활동’이라는 것의 존재도, 소위 ‘스펙’이라는 것을 시대가 요구하고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세상을 알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던 무지렁이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낯설었고, 설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이렇게 강조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대학 생활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부산에서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고 있는 내가, ‘구글’이라는 글로벌 기업에 다니며, 방송 다큐멘터리까지 나오는 사람을 무슨 수로 만날 수 있겠는가. 불가능했지만 잃을 건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몰랐기 때문에 책에서 그가 소개한 여러 활동들을 찾아봤고, 가장 힘줘서 추천한 Young Leaders Club (YLC) 라는 곳에 관심이 생겼다. 시장경제에 대해서 공부하는 전국단위의 연합동아리였다. 마침 부산을 중심으로 운영이 되는 경남지부가 있었고 이전 학기 신입회원을 모집하는 홍보 글을 학교 게시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운영진이라고 기록된 연락처로 무작정 연락을 해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요청했다. 검색을 통해서 충분히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만 받았을 뿐 만날 수는 없었다. 과한 열정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우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냉정을 되찾고 천천히 검색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은 뒤 다음 기수 신입회원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2010년 9월, 전국의 7개 지부, 약 400여 명의 신입회원들이 숙명여대에 모여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첫날에는 활동에 대한 소개, 지부별 장기자랑, ‘쌀집 아저씨’로 유명한 MBC 김영희 PD의 특강이 있었다. 다음 날에는 모처의 중학교에 모여서 운동회를 진행했다. 응원단장을 맡아서 목청 높여 소리를 치던 중 본부석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YLC의 자랑, 6기 김태원 선배님께서 신입 YLCer(YLC 회원들을 부르는 말)들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방문해주셨습니다!’ 순간 눈과 귀를 의심했다. 책 속에만 존재했던 그 사람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군대에서 만난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추천해줬고 저자의 삶의 태도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그 책의 저자가 추천하는 동아리에 지원을 했고, 운 좋게도 합격했다. 한 사람이 찍어놓은 발자취를 따라갔더니 그 끝에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알 수 없는 우연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상황을 만들어냈고,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나만을 위해 준비된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이렇게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분의 휴대폰 속에 저장되는 YLCer 중 한 명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하나의 목표를 이뤘더니 또 다른 목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을 했다. 다음 학기에는 경남지부장으로 신입회원들을 이끌었으며, 그다음 학기에는 회장이 되어 전국의 운영진들과 함께 전체 프로그램을 총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 속에서 크고 작은 관계들을 만들어가며 책에서 글자로만 읽었던 ‘약한 연결의 힘’이 가진 가능성을 체험했다. 그리고 ‘Passion makes you sexy’, ‘죽어있는 열정이 아닌 움직이는 열정’이라는 저자의 말들을 내 삶으로 끌어들여 활동들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돌이켜보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던 내가 유독 책 읽는 사람에 대한 매력을 강하게 느꼈다. 이유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젠 ‘그냥’ 이라고 말한다. 책은 나에게 사람을 연결해주었고 그 사람은 또 다른 책을 연결해주었다. 나의 지난 10년은 이 과정의 연속이었다. 야구를 하기 전 몸을 풀 때 캐치볼이라는 것을 한다. 처음에는 10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시작하지만, 천천히 공을 주고받으면서 몸을 풀다 보면 어느덧 50m가 넘는 거리에서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공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책과 사람이 만들어 낸 연결의 반복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범위와 수준을 조금씩 넓혀주고 있었다. 이제 나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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