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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씨 Jun 19. 2022

북유럽 창의놀이터 이야기

놀이터라는 무한한 세계


스톡홀름의 과일놀이터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엔 공공놀이터가 없었다.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까지는 거리도 꽤 멀어서, 집에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나면 학교 운동장까지 가는 대신 골목이나 자그마한 동네 뒷산(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에서 놀곤 했다. 미끄럼틀이나 그네가 없다고 아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들이 동네에 존재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때였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과 동네 공터나 집 앞 마당을 신나게 헤집고 돌아다니다 해가 질 무렵에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공공놀이터와 아파트 놀이터를 돌아다니면서 내가 어릴 때보다 참 많이 좋아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면서 점점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놀이기구들에 지루해졌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실내 키즈카페를 다니는 게 아이도 더 재밌어하고 나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우연히 김성원 작가가 쓴 놀이터에 관한 책 『마을이 함께 만드는 모험 놀이터』라는 책을 읽게 됐다.


놀이터의 모든 역사를 집약해둔 그 책에서는 미끄럼틀, 그네, 시소, 모래놀이로 이루어진 일명 ‘4s’ 시스템이 미국에서 시작돼 일본을 건너 박정희 정권 시절 우리나라에 정착된 것이라고 설명돼 있었다. 옳거니, 어딜 가든 똑같은 모습의 놀이터들이 있었던 이유에 그런 배경이 있었구나. 괜스레 억울한 기분이 몰려온다. 책에서는 유럽의 창의놀이터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놀이터 혁명을 주도했던 덴마크 모험 놀이터가 내 눈길을 끌었다.

덴마크는 1943년 세계 최초 모험놀이터를 만들었다. 덴마크 조경사였던 쇠렌센(C. Th. Sϕrensen)은 아이들이 공공놀이터보다 버려진 폐목재나 공사장 타이어가 쌓인 공터에서 더 즐겁게 논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덴마크의 모험놀이터가 높은 호응을 얻자 영국이나 독일 같은 이웃 국가들도 덩달아 모험놀이터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이후 모험놀이터는 유럽 전역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공터와 뒷산이 그토록 재미났던 것은 그곳이 모험놀이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 공터에도 폐타이어나 하수도관 같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을 때가 많았고, 나는 그 속을 돌아다니거나 기어오르며 모험심을 키우곤 했다. 주택가 한쪽의 별 볼 일 없는 작은 언덕도 내게는 비밀의 장소가 돼줬다. 획일화된 공공놀이터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스톡홀름의 부엉이놀이터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여행을 하면서 나는 아이와 함께 창의놀이터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사실 일부러 찾아갈 필요도 없는 것이, 숙소 근처이든 관광지이든 어딜 가든 다양한 창의놀이터가 넘쳐났다. 난파선부터 비행기 구조물, 거대 독수리나 부엉이, 곰 미끄럼틀, 딱정벌레, 고래, 버섯, 딸기, 바나나…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놀이기구로 만들어져 있었다. 요즘엔 우리나라의 신식 놀이터에서도 인기인 집라인이나 인라인스케이트장 시설도 잘돼 있고, 닭이나 양 같은 가축을 키우는 농장 놀이터도 있었다. 놀이터에는 심플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킥보드나 자전거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비치돼 있어서 아이들이 개인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고 올 일도 없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엔 오두막 모양의 휴게실도 딸려 있다. 휴게실 안엔 화장실, 수유실, 간단한 놀이기구가 갖춰진 실내 놀이실이 있어서 간식도 먹고 쉬었다 또 놀 수 있다.

그리고 모험놀이터의 창시자라고 해서 언뜻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북유럽 놀이터들은 안전에도 철저하다. 줄로 된 정글짐이나 바닥에 장착된 트램펄린 같은 것들은 아주 튼튼하고 바닥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여행 도중 한 개라도 더 많은 놀이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다음 놀이터, 또 다음 놀이터로 발길을 돌렸지만, 내가 가자고 하지만 않았다면 아이는 아마 놀이터 한 군데에서도 몇 시간은 거뜬히 놀았으리라.

스웨덴 예테보리 슬로츠코겐 공원 놀이터. 이걸 타려고 아이들은 언덕을 오르고 또 오른다. 『너만큼 다정한 북유럽』중에서

최근엔 우리나라도 북유럽 국가들을 모델로 한 멋진 창의놀이터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미 인기를 끄는 곳도 있고, 앞으로 만들어질 곳도 꽤 많은 듯하다. 좋은 현상이다. 짝짝짝… 그런데 사실 내가 사는 곳은 아직도 어딜 가나 4s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 운동장에는 얼마 전 두 개짜리 미끄럼틀이 처음 설치됐는데, 아이들이 하도 너도나도 줄을 서서 타느라 입장을 정리해주는 안전요원(솔선수범에 나선 고학년 오빠)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미끄럼틀은 역시 미끄럼틀일 뿐. 그 인기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식었다.

아무쪼록 우리나라도 전국에 재미난 창의놀이터가 많이 생겨나기를. 부모들도 모르는 사이 아이들의 몸과 맘을 훌쩍 키워주는 놀이터라는 그 무한한 세계를, 다같이 신나게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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