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어야 여행도 잘한다
북유럽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물가가 비싸기로 악명이 높다. 최저임금과 소비세가 높은 탓에 외식비도 덩달아 오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유럽 사람들은 점심엔 도시락을 먹고 저녁엔 집밥을 해 먹는 게 당연하지만, 낮이며 밤이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부 여행자들에게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외식하다가 불평불만을 토해내는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맥도날드 햄버거 세트 하나가 만 오천 원이 넘으니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북유럽으로 떠나게 될 미래의 여행자들이 자칫 ‘맛있게 먹지도 못하고 경비만 날렸네’ 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우리 부부의 건강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북유럽 먹거리 노하우를 소개하고 싶다.
사실 우리 부부가 북유럽 이전에 여행했던 나라들에서 먹어온 것들은 보통의 여행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트에 가면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신기한 먹거리나 달콤한 간식, 기념품 위주로 장바구니에 담았고, 식사는 당연하게 밖에서 해결했다. 오픈 전부터 긴 줄이 늘어서기 때문에 한 시간 전에는 가야 한다는 식당도 ‘지금 아니면 언제 가보겠어’라며 달려가서 줄을 섰고, 돌아다니느라 바쁠 땐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 간편식도 자주 사 먹었다. 대체로 탄수화물 위주의 기름진 식단으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에 먹을 땐 분명 맛있게 먹어도 돌아서면 속이 꾸르륵, 여행한 지 며칠만 지나면 허리띠 구멍을 좀 더 늘려야 했다.
북유럽으로 떠났을 당시 나는 항암 치료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기도 했고, 일곱 살 어린아이를 데리고 떠난 장기여행이기도 했기 때문에 인생 처음으로 건강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아침과 저녁은 숙소에서 신선한 야채와 고기로 간단히 해 먹고, 점심은 카페에서 제공하는 가벼운 런치 메뉴나 빵으로 해결하며, 북유럽 마트의 세계로 서서히 입문했다.
이 말은 내가 덴마크 코펜하겐을 여행하며 자주 했던 말이다. 특히 유기농 슈퍼마켓 체인점 이야마(Irma)를 처음 방문했을 땐 사방 어디를 살펴봐도 모두 건강하고 싱싱한 식재료들뿐이라 더욱 그랬다. 우리나라도 유기농 슈퍼마켓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이야마는 가격도 우리나라 대형 마트와 비슷한 수준에 어디서나 편의점 가듯이 쉽게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지점 수가 많았기 때문에 살짝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는 북유럽 사람들이 퇴근 후 집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샐러드나 고기, 생선도 손질이 잘돼 있어서 전자레인지와 인덕션, 몇 가지 조리도구만 갖춰진 작은 주방에서도 간편하게 해 먹을 수 있었다. 꼭 유기농 체인점인 이야마가 아니더라도 덴마크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가는 레마1000(REMA1000)을 비롯해 메니(Meny), 팍타(Fakta) 등에 가도 건강한 식재료를 저렴한 가격으로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쯤 돼서 한 가지 의문이 들지 모른다. 건강한 음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 말이다. 건강한 음식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온 방식과 음식에 대해 가진 지식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기농 슈퍼마켓을 방문한 북유럽 사람이라고 누구나 건강식을 먹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유난히 건강하게 균형 잡힌 체형과 안색, 온화한 인상을 지닌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장바구니를 유심히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고르는 식재료들은 믿을 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유럽 마트에는 무료로 제공하는 잡지나 엽서가 비치돼 있는데, 그곳에도 건강한 레시피 정보가 많이 담겨 있어서 참고하기 좋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매일 오후 5시쯤이면 100% 호밀빵, 블루베리나 블랙베리 같은 베리류, 저지방 요거트, 귀리음료, 페타치즈, 병아리콩 후무스, 돼지고기(지방이 적고 살코기가 적은 부위), 비건 소시지(가끔은 일반 소시지나 베이컨) 등등을 장바구니에 가득 넣어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아침은 전날에 산 과일과 뮤즐리, 오트밀로 가볍게 먹었더니 하루의 시작이 가뿐했다.
또 북유럽 마트의 한 가지 좋은 점 중 하나는 사탕이나 과자 종류가 적어서 자연스레 아이가 간식을 많이 찾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원하는 만큼 종이에 담아 무게를 재서 파는 젤리 코너가 있긴 했지만, 아기자기한 그림과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우리나라의 제과회사 제품에 비해 그 매력이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라, 처음엔 “간식!! 간식!!” 노래를 부르던 아이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져 간식을 자주 먹지 않게 됐다. 북유럽 아이들은 주중엔 사탕이나 젤리를 거의 먹지 않고 주말에만 먹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데, 현지 마트에서도 이를 체감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와 함께 이런 방식으로 덴마크를 비롯해 스웨덴, 핀란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까지 두 달여를 여행했다. 스웨덴도 이카(ICA)와 쿱(COOP)으로 대표되는 마트들에서 신선하고 간편한 식재료들을 구할 수 있고, 핀란드는 K 슈퍼마켓, S 슈퍼마켓이 대표적이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어찌하다 보니 물가가 비싼 곳에서 싼 곳으로 차례로 이동했다는 점. 덴마크의 마트 물가는 우리나라와 비슷했지만 그 뒤로는 점점 더 저렴해서 나중에는 여행경비가 도리어 늘어나는 착각까지 일어났다. 우리 부부도 의도치 않게 이런 여행을 하게 됐지만, 국가 간 이동 일정을 짤 때 이 방법은 매우 추천할 만하다. 여행을 하는데 뒤로 갈수록 돈을 버는 느낌이라니, 얼마나 신나는 경험인지!
마지막으로 '여행지에서 맛집 다니기만 해도 바쁜데 꼭 피곤하게 준비해 먹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나도 과거엔 그랬다. 하지만 요즘엔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를 만든다’라는 말을, 건강을 잃고 되찾는 과정을 겪으며 절실하게 느낀다. 북유럽 사람들의 행복도가 유난히 높은 이유 중 하나에는 그들의 좋은 식습관도 큰 자리를 차지하리라. 싱싱하고 건강한 재료로 식사하면 속이 편안하고 마음도 차분해지는 반면,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나면 성격이 급해지고 화도 잘 나기 마련이다. 얼마 주어지지 않은 일정 동안 낯선 곳을 여행해야 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챙김과 체력이 중요하기에, 여행지에서 건강한 음식을 먹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