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를 봐야겠다.

by 쓰는 사람 효주

이상하다. 쓸 문장이 엄청 쌓여있었는데 그것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화면을 바라봤다. 턱에 손을 괴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데려와 본다. 특별할 것도 없는 월요일이었다. 어느 월요일마다 가는 코스를 돌았고 방문한 마트마다 우유가 그대로 남아 있어 한숨을 쉬기도 했다. 아침부터 남편은 본사에서 보낸 우유가 전부 재고라며 한탄을 했다. 지난 주말 미리 만들어 논 우유들이 주문 미달로 판매되지 않은 건지. 공장사람들이 휴가를 가기 위해 미리 이틀정도의 우유를 만들어 논건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날짜가 짧은 우유를 받을수록 반품 확률은 올라가고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는 일은 당연한 거니 우리에겐 이래저래 손해다.


지난 토요일 직원과 저녁을 먹고 회식유흥비 명목으로 여비를 챙겨준 남편은 월요일 아침 출근한 직원의 시큰둥한 표정과, 대화의 오고 감이 너무 적어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일하는 그에게도 짜증이 나 있었다. 대리점에 내가 도착한 시간은 8시 10분. 그때까지 그에게 일어난 일이 유쾌하지 않았으니 물건을 차에 시르고 출발하기 전 간단히 요기를 때우는 십 분간 남편은 출근 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회식 술자리에선 그리 좋은 사람처럼 굴던 직원이 월요일 아침엔 다른 사람이 되어 왔으니 나름 신경 써서 챙겨줬던 자신의 성의가 의미 없는 무관심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으리라. 늘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땐 남편 편이 되어 준다. 우리 둘의 험담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둘만의 공간에서 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함께 바라봐주는 것만큼 위로가 되는 건 없으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팀워크가 좋은 한 편이 되어 누구든 씹을 수 있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여름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날씨가 이어졌다. 기온은 27도에서 28도를 오갔지만 습도가 높아 에어컨 없이 견딜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안흥으로 몰려오는 오징어 떼 덕에 안흥항으로 들어가는 도로는 만원이었다. 삼 주 전부터 오징어를 구매하기 위해 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맛집에 줄을 서듯이 근흥로에 즐비해 있다. 끝도 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차량들 덕분에 우리 우유도 많이 팔렸으면 좋았겠지만, 실상은 오징어의 반의 반도 팔리지 않으니 오징어 판매와 우유판매는 하등의 상관관계가 없음이 밝혀지는 예시리라. 3주 전 차량의 밀도가 깊어지기 전 우리는 거래처에 우유를 넣고 오징어 한 박스를 구매했다. 스무 마리에 오만 오천 원. 이틀 전만 해도 사만오천 원에 팔리던 오징어인데 사는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가 금방 가격이 올랐다. 일 년에 한 번 안흥에서 사 온 오징어로 튀김을 해 먹은 지 3년 차다. 처음엔 튀김옷을 입힐 줄 몰라 오징어 따로 튀김옷 따로 튀기고 먹을 때도 옷 벗겨진 오징어를 먹었는데 이제 노하우가 쌓여 제법 튀김다운 튀김을 만들어 먹게 되었다. 물론 가스레인지 사방으로 튀는 기름을 제거하는 일은 바삭한 튀김을 먹는 일에 비해 너무 힘들고 오래 걸렸지만 말이다. 잠깐의 기쁨을 위해 장기간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 또 인간이니까.


일을 하다 보니 퇴근 시간이 되었고 집에 와서는 30분 정도 낮잠을 잤다. 저녁을 준비하기 전 청소기를 돌리고 집안을 정리해야겠지만, 아직 방학이 끝나지 않은 큰애가 신경 써서 정리해 준 집안이 깨끗해서 청소기는 건너뛸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일이 없었다. 지난번 월요일과 크게 다른 점도 없었고, 똑같은 원을 그리듯이 그려진 하루일 뿐이다. 그런데 왜 마음은 지쳤을까? 어제 완독한 <배움의 발견>이 5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에세이었는데 이걸 읽느라 진이 다 빠졌던 건지 아니면 그 이야기의 강렬한 여운 때문에 다른 책이 들어오지 않는 건지.. 어떤 건지 명확하지 않지만, 조금 지쳤다는 느낌. 쉬고 싶다는 몸. 마음 어딘가가 조금 고장 난 기분. 딱히 아픈 증상은 없지만 불편해서 뒤척이게 되는 잠자리의 껄끄러움이 가득한 밤처럼. 나는 지금 조금 어렵다.


아무래도 아까 전에 보다 말았던 다큐멘터리를 마저 보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