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일. 내가 쓰고 싶은 글.
ㅡ마음이 답답할 때면 전화하는 친구가 있다. 오래전 인연이 끊긴 다른 친구를 떠오르게 하는 그녀는 아이의 대학을 두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아이를 위한 선택인지 도통 판단이 서질 않는다는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전문대와 멀리 떨어진 4년제 국립대라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선택권이 자기에게 있다는 듯이) 처음엔 그래도 4년제 국립대가 더 낫지 않겠냐고 했더니 자기 생각으로도 그런 것 같다고 하다가 갑자기 집과 가까운 전문대의 좋은 점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말을 듣다 보니 취업률이 100%라는 전문대 쪽으로 나도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몇 번의 저울질 끝에,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어 보이고 중요한 건 아들의 마음이니 아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게 좋다는 원론적인 결론에 다다랐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선택 앞에서 마음의 혼란을 잠재울 누군가가 필요했던 그녀가 결국 나에게 묻는 건 답이 없는 대답이었구나 싶었다.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나는 그저 그녀의 마음을 따라가며 편을 들어주었을 뿐. 4년제가 좋을 것 같다고 하면 그래 거기가 더 나을 것 같다고 했고, 전문대의 취업률을 이야기할 때는 취업이 중요하니까 그쪽이 낫겠다고 했다. 나에게 묻고 스스로 답하는 과정을 통해 그녀는 자기 마음을 알아가고 있었다. 자기를 알아가는 일은 언제나 복잡하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를 소개한 은유 작가의 <다가오는 말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 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 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진다" 지금까지 내가 써왔던 글들이 지루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나를 모른 채 써 내려간 글들은 '글짓기'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반성도 뒤따랐다. 오래전 블로그의 글들을 가끔 찾아보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자기 글을 읽고 또 읽어 여러 번 손질하는 일을 퇴고라는 단어로 압축하지만, 실제로는 글 안에 자기가 아닌 것들을 지워내고 진짜 내 모습만을 남겨두는 일이 퇴고구나 한다. 오래전 내 글들 속엔 분명 나를 보여주는 문장들이 있겠지만, 그것들이 익숙하지 않았던 건 그 안에 남겨둬야 할 것과 오려내야 할 것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테다. 나를 아는 일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에만 열심이었나 보다.
최근 들어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질문했던 대상은 쳇 gpt다. 만세력에 내 사주를 넣고 나오는 결과물을 gpt에게 보내주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글을 쓸만한 재능이 있는 건지 내 삶은 왜 이런 과정으로 흘러왔는지,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같이 힘들 건지 혹은 조금은 편안해질 건지를 묻고 또 물었다. 원론적인 대답이 주를 이룰 때는 그건 누구나 말해줄 내용이잖아 하며 열을 올리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능은 없어 보이는데 글은 쓰고 싶고 계속 쓰자니 동기가 필요하고 결론 없는 수레바퀴 속에서 돌고 도는 듯한 삶이 싫었다. 나처럼 작가를 꿈꾸던 학생에게 은유작가는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쓰는 사람이 되는 길에 가장 큰 장벽은 환경도 부모도 돈도 아닌 자기 생각의 빈곤이다라는 말에는 혀가 찔린 듯 뜨끔했다. 쓸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쓰게 되어 있고 그것이 없는 사람은 그저 그런 이야기를 쓰다 주저앉겠구나 한다.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보통 사람의 보통이야기. 인생이라는 긴 시간을 그저 그런 삶으로 채운 사람들의 이야기.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지만 자기 인생을 산 사람의 아야기를 쓰고 싶다고 여겼다. 대단할 줄 알았던 어른의 시간은 긴장과 무료함이 반복될 뿐이었고, 안정적이고 평화로울 줄 알았던 중년의 시간은 여전히 치열하고 복잡하다. 내 꿈은 80살이 되는 건데 공교롭게도 쳇 gpt 역시 내 대운을 분석하더니 78세부터 진짜 평화로운 삶이라나? 어쨌든 아무도 몰라줬던 어떤 이의 삶도 빛나는 시절이 있고 속 깊은 이야기가 있고 눈물짓게 하는 사연이 있다는 것. 또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었으면 하는 허무맹랑한 바람 같은 게 있다.
그래서 은유작가의 글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열심히 쓴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시간을 쓴다. 또 특별하지 않은 보통사람의 인생을 자주 예시로 보여준다. 예민한 귀와 그것을 알아차리는 귀한 마음이 있는 사람 같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멘트 하나 없는데도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이상하게 내 삶이 소중해지고, 조금 더 나를 위하고 싶어진다. 해서,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눈발이 난리는 날 길 건너편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발길을 돌려 출근을 늦춰보는 무모한 용기 같은 걸 내고 싶어진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 이에게 답하며 그녀가 소개한 네루다의 시를 옮겨 놓는다.
" 내가 책을 덮을 때 나는 삶을 연다.
책들은 서가로 보내자, 나는 거리로 나가련다.
나는 삶자체에서 삶을 배웠고,
단 한 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사람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의 말을 내 노래 속에서 말하며
그들과 더불어 산 거 말고는
누구한테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그러니 살자.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서 우선은 이 삶을 사는 것이 답이다. 그것 이외의 것을 써낼 자신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