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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May 01. 2023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생의 마지막 얼굴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나요? 당신이 일곱 살이었을 때 아버지 얼굴이 어땠는지요.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일곱 해가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삶이 끝나가고 있었던 때였거든요. 딸에게는 이제 일곱 번째 삶이 시작되었는데 아버지의 삶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죠. 암이 발병된 지는 더 오래 전이였겠지만, 아이가 여섯이나 되고 아내마저 여윈 남자는 자신의 몸을 돌볼 틈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다 참아내기 어려운 통증이 느껴지고 나서야 병원을 찾았겠지요. 당시 시골에서 암이라 함은 걸리는 즉시 죽는 날을 기다려야 하는 무서운 병이었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고, 치료법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하는 그런 곳이었어요.


제 기억 속 아버지는 살점이 없는 볼에 깊게 페인 팔자주름, 얼굴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곰보자국이 가득한 나이 든 할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나이를 헤아려보기 전까지 저는 늘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거라 생각했어요. 나이가 많이 든 노인처럼 생각했거든요. 성인이 되고 시간이 더 더 지나고 나서야 돌아가신 아버지 나이가 마흔일곱과 여덟 사이였다는 걸 알게 되었죠. 요즘 그 나이를 누가 노인으로 여기겠어요. 아직도 한창 일할 나이이자 아직은 젊은 축에 속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가수이자 예능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종국 씨 나이도 마흔여덟인데 삼십 대에 뒤지지 않는 외모를 유지하고 있죠. 그러나 제 기억 속에 저희 아버지는 칠십 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농사꾼이셨죠. 일평생을 논과 밭에서 지낸 사람의 얼굴은 빨리 노화될 수밖에 없었을 거고, 당시 암이란 병을 앓고 계셨으니 먹는 게 변변치 않으셨을 겁니다. 늘 힘없고 아파 보였던 아버지의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누워 지내 던 어느 날은 밖에서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나를 곁에 붙잡아 두셨어요. 문 밖에서 " 정애야 노오올 자~" 하는 소리에 몸이 들썩였던 저를 나무라시며 그냥 있으라고 하셨죠. 당시엔 그런 아버지가 야속하고 답답하고 미웠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자신의 생이 곧 끝날 거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에 저를 옆에 두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어린 제가 그걸 알리가 없었겠죠. 나른하고 지루하기만 했던 오후 시간 아버지 옆에 이불을 덮고 누워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던 저는 어느새 잠이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숨이 줄어들어 가던 아버지의 숨소리는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겠지요. 어린 딸은 아버지의 삶의 끝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죠.


그러다가 마침내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숨이 더 이상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맴돌다가 멈춰버린 날 말입니다. 그날 저는 둘째 언니와 집에 있었죠. 아버지의 죽음이 임박해 오자 언니는 겁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자꾸 아버지를 부르라고 시켰어요 " 정애야 아버지 불러야! 빨리 아버지 불러!" 저 역시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아버지의 몸과 표정에 무척이나 겁이 나 있는 상태였어요. 그렇지만 제가 불러야 아버지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언니의 말을 믿고 닭똥 같은 눈물을 연신 떨구며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 아버지!! 아버지!! 가지 마..." 하면서요. 마치 제 부름으로 아버지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것처럼요. 몇 번을 불렀는지 몰라요. 울면서 계속 아버지를 불렀던 기억은 지금도 저를 슬프게 합니다. 저의 부름은 아버지를 살려내지 못했고 오히려 더 아프게 한 건 아닐까요? 기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기능이 청력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분들은 숨이 끊어져도 유가족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권한데요. 그날 아버지는 아마도 분명히 제 목소리를 들으셨을 겁니다. 막내딸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요. 그런 걸 생각하면  아쉬기 합니다. 아버지만 부르지 말고 좀 더 다정한 말을 해줄걸 하는 아쉬움이요.  둘째 언니라도 아버지에게 잘 가시라고 우리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시라고 말해줬다면 참 좋았겠단 생각이 지금에서야 듭니다. 그러나 저는 일곱 살 둘째 언니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해였지요. 아버지를 편이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일분일초라도 아버지가 우리 곁에 더 머물기 바랄 나이잖아요.



아버지는 제 목소리에 마음이 아프셨을 겁니다. 제가 가장 눈에 밟히셨겠지요. 너무 어렸으니깐요. 고통으로 일그러지던 사지가 비비 꼬이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절규하던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토해냈을 때 모든 것이 멈췄습니다. 두 눈을 감지 못하신 체 죽음 앞에서 극한 두려움에 떨던 모습 그대로 아버지의 시간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눈앞에서 한 사람의 생이 끝나는 순간을 목격한 저는 사는 동안 늘 그 장면을 되감기를 통해 재생하고 또 재생하며 살았어요. 일곱 살 아이가 경험하기엔 너무나 큰 일이었죠. 사십일 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의 숨이 끊겼던 그 마지막 장면만은 잊지 못하고 있어요. 너무나 강렬한 기억이었죠. 저는 이후로 다소 겁이 많은 아이로 성장했습니다. 무서운 영화를 보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아침해가 떠오른 후에 잠이 들곤 했어요. 낯선 곳에 여행을 가 묵어야 할 펜션이나 호텔에서도 늦게까지 잠못이루거나 아예 한숨도 자지 못하는 일이 많았고요. 늦은 밤거리를 걷는 것도 무서워해 무조건 달리는 게 습관이 될 정도였답니다. 아직도 그런 두려움은 남아 있어요.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마음속 큰 자국들은 삶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장에 다녀오신 날이면 하얀 설탕가루가 묻혀 있던 콩사탕을 사 오셔서 에게만 주셨던 아버지, 식사 중에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밥을 떠 먹이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좋아 볼에 입맞췄던 어린 시절의 나, 가마를 태워주셨던 모습.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을 주셨다는 느낌. 그런 것 역시 기억 저장고에 남아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전해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일곱 해밖에 함께 살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 표정 그리고 따스한 손길 같은 거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느낄 수 있었던 거죠.


아버지의 얼굴을 가끔 떠올립니다. 행복하게 웃는 표정이 아니라 무덤덤하면서도 슬프고 외로운 표정이라 속상하지만, 그 사람이 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좋습니다. 힘없조금 불쌍한 모습의 아버지라도 제 아버지라서  좋습니다.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든 부디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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