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님이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사탕수수가 남긴 달콤한 추억이 있어요.
제가 자란 시골에는 슈퍼가 없었어요. 있더라도 집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있더라도 사 먹을 돈이 없었죠. 그래도 밥만 먹기엔 너무 심심해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산으로 들로 밭으로 헤매고 다녔던 것 같아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친구와 함께 나눠먹었던 수탕수수 줄기입니다. 옥수수 줄기랑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마디마디를 뚝뚝 끊고 한 입 베어 쭉쭉 빨아먹으면 달콤한 즙이 입안으로 가득 들어왔죠.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멀고도 긴 시골길을 걷다가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우리는 길 옆에 곧게 자란 사탕수수 하나를 뿌리체 뽑아 마디를 댕강 잘라내고 하나씩 나눠먹었답니다. 훔쳐먹는 음식이 더 맛있다고 하잖아요. 국민학교 1학년이 된 그해 여름 친구와 함께 먹었던 사탕수수는 사십 년이 넘도록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합니다. 딱 한 번만이라도 똑같은 맛을 느껴보고 싶어요. 어떤 음식은 살면서 딱 한 번만 먹게 되는 것 같아요. 두 번은 없죠. 다시 맛보지 못할 사탕수수가 그리워집니다.
제가 그때를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건 아마도 함께 했던 친구 덕인 것 같아요. 맹님이란 친구였는데 저보다 등치도 크고 키도 큰 아이였어요. 심심할 때마다 저희 집에 찾아와 대문 앞에서 저를 불렀어요 "정애야~ 노오올자~"하면서요. 볼이 통통했던 그 친구 얼굴은 가물 가물합니다. 다행히도 어릴 적 함께 놀다가 찍힌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더라고요. 동네 큰 오빠들이 무슨 일인지 그날 사진기를 가져왔고, 저와 그 친구, 그리고 또 다른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사진을 찍어줬어요. 사진 속에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마른 풀밭에 빨간색 점퍼를 입은 말랑깽이 제가 있고, 그 옆에 어디서 났는지 풍선을 손에 들고 배시시 웃고 있는 맹님이 가 서 있습니다. 누가 찍어준지도 모를 사진이 남아 평생토록 그 친구 얼굴을 잊지 않게 도와주고 있네요.
일곱 살 11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다음 해 저희 남매는 인천으로 올라왔어요. 맹님이와도 이별이었죠. 우린 인사도 못 나눴던 것 같아요. 기억이 없거든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소식을 들은 적도 너무 오래라서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런데 함께 사탕수수를 베어 먹고 행복했던 그날은 두고두고 잊히질 않네요. 달콤한 사탕수수의 힘이었는지 돌아오는 길에 두 손을 맞잡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왔던 것까지 기억이 납니다. 해는 저물고 있었지요. 우리가 오후반으로 간 건지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돌아오는 길에 뉘엇뉘엇 해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분명 행복해하고 있었을 겁니다.
삶의 어떤 풍경들은 이렇게 아름답게 남습니다. 그런데요. 그때는 전혀 몰랐어요. 저는 늘 맹님이와 함께 그 길을 걸을 줄 알았어요.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그날까지요. 그 삶이 변함없이 계속될 줄 알았죠. 사탕수수밭에 언제든 또 가서 몰래 훔쳐 먹을 수 있을 거라 여겼어요. 다음에 또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죠. 제가 인천으로 떠나고 맹님이는 누구와 학교를 다녔을까요? 혹시 그 수수밭에 몰래 들어가 저 혼자서라도 달콤한 즙을 빨아먹었을까요? 아니면, 저처럼 그날을 기억하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까요? 앞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삶의 궁금증들이 있어서 행복해집니다. 남은 인생동안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궁금하지만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에 즐거워집니다.
결말을 알 수 없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 때문에 미칠 듯이 궁금해지는 다음 이야기처럼 우리 삶에도 끝내 모르고 끝나는 일들 덕에 앞으로의 일들이 더 궁금해지고 기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궁금한 이야기들은 당신에게도 풍성하겠지요? 끝내 알지 못하고 끝난 일들을 정리해 보세요.
내가 몰래몰래 좋아했던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릴 적 서로 간의 추억을 남겨두자며 땅에 묻어 두었던 보물상자는 아직도 거기 있는지? 고등학교 3년간 절친과 걸었던 그 하굣길은 여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