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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May 08. 2023

한 시절이 끝난 이야기.

나의 단짝 윤아

나에게 언제나 친구가 중요했다. 학교가 끝나고 홀로 있던 긴 시간을 함께 해줄 친구가  필요했으니까. 그 적막하고 고요한 집에 홀로 있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두려움이다. 한 친구와 관계가 소원해지면 곧바로 다른 친구를 만들곤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버티질 못했다.  지금이야 이름도 얼굴도 흐릿해졌지만, 그중 몇 명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내 삶에 꽤나 큰 자국을 남긴 친구들은 지금도 가끔 나를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나는 미안해지거나, 그립거나, 조금은 슬퍼지거나 하다가 때로는 활짝 웃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윤아는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 3학년과 4학년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다. 유머감각은 나보다 다섯 배 정도 뛰어났고.(수치로 잴 순 없지만 느낌상) 키도 크고 빨간 머리 앤처럼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었다. 그 친구와 있다 보면 나는 내내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야 했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정신없이 웃다 보면 저녁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헤어졌, 다행인 건 늘 내일이 있었다는 거다. 만날 수 있는 내일의 시간은 무한정했고, 내일은 언제든 오늘이 되어 찾아왔다.  


윤아가 잘하는 건 성대모사였다. 학교 선생님, 가까운 친구, 당시 유명했던 개그맨들의 목소리를 자기만의 각색을 통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다. 목소리뿐 아니라 얼굴 표정이며 말투까지, 혼신의 연기력을 이용해 성대모사하는 윤아덕에 나는 행복한 오후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도 그 애를 따라 녹음하기도 했지만, 능력자 윤아에게 미치진 못했다.


무더운 여름날 재미난 놀이를 찾다가 실패한 우리는 보물상자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한 물건들을 챙겨 와 네모난 상자 안에 넣고 풀이 울창하게 자란 동네 빈 터에 숨겨두기로 한 거다. 한 여름, 빈 터에 자라난 풀은 무성했고, 우리만의 비밀 기지로 안성맞춤이었다. 5년 후 혹은 더 멀리 성인이 되어 꼭 이곳에 다시 와서 함께 숨겨둔 보물을 찾아내기로 약속했다. 삶이 어떻게 달라지질 모른 체 우리는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걱정거리나 고민거리 없이 마냥 웃고 신나게 놀 수 있었던 시절이다.


윤아와의 즐거웠던 시간에 규열이 생긴 건 서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찾아왔다. 5학년이 되어 각자 다른 반이 된 것도 원인이었지만, 나보다 키가 컸던 유나에게 전에 없던 변화가 시작되었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지냈던 나와는 다르게 5학년이 된 유나는 겉모습을 꾸미기 시작했다. 앞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스프레이를 뿌려 고장시키고 청카바에 멋을 부린 듯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나를 낯설게  했. 정을 숨기지 못했던 나는 서서히 윤아와 거리를 두었다. 아침마다 함께 했던 등교를 피하고, 학교가 끝나고 나서도 그 애의 전화나 방문을 꺼리기 시작한 거다. 윤아도 내 행동에 속이 상했을 거다. 갑자기 변한 내가 싫었을 거다. 결국 어느 일요일 오후 윤아가 찾아왔다. 없는 척하기엔 집에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대문으로 나가 윤아를 만났다.


" 야 너 왜 그래? 등교도 같이 안 하고 전화도 피하고, 내가 뭐 잘 못했냐?"


" 아니, 너 요즘 너무 변했어. 날라리 같아"


" 왜? 어디가 날라리 같은데?"


" 머리도 그렇게 힘주고 다니고 옷도 전과 다르게 입고, "


" 야. 머리 이렇게 하면 다 날라리야? 옷도 이게 뭐가 어때서? 내가 너한테 그것밖에 안되니?"


마지막 말을 내뱉은 윤아는 내 앞에서 울었다. 나는 당황했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사과하고 그냥 옛날처럼 지내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매몰차게  몰아붙이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울던 윤아는 곧장 집으로 가버렸고 나는 대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 멀어진 순간이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우정에 금이 가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쓸쓸한 감정과 그래도 변한 그 애를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야릇한 고집이 교차하는 그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살면서 두고두고 그 장면을 재생시켰다. 사십오 년이 넘는 시간까지 재생은 멈추지 않았고, 아직도 나는 어리숙했던 나의 고집과 쓸쓸하게 돌아섰던 윤아의 뒷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나의 유년시절은 그렇게 끝이 났다. 윤아 이후로 만났던 친구들과는 아무 걱정 근심 없이 마냥 웃고 떠들며 지내지 못했다. 학업 문제라던가 친구들 사이의 소소한 감정싸움이라던가 누가 누구와 더 친한가 하는 자잘한 문제들은 끊이지 않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친구를 대했던 것은 윤아가 마지막이었다.


삶의 어떤 일들은 마지막인지도 모른 체 왔다 간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내 삶이 달라졌다는 건 시간이 더 흐른 후에나 드러난다. 나는 얼마나 많은 마지막을 그냥 떠나 보냈을까? 그러고 보면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간도 내 삶의 마지막 순간과도 같다. 다시는 이와 똑같은 글을 쓰지 않을 테니까. 다시는 2023년 5월 8일은 오지 않을 테니까. 수많은 마지막을 떠나보내고 결국 죽음이라는 처음맞이하는 게 우리 삶인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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