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전까지 자주 이사를 다녔습니다. 전세 계약 2년을 채우고 떠난 집, 1년 만에 나온 집, 2년을 연장해 4년을 살다가 나온 집까지 합하면 8번에서 10번 정도 다닌 것 같네요. 당시엔 이번이 일곱 번째야 하면서 수를 헤아려보기도 했는데요. 시간은 힘이 세서 잊지 말이야지 결심한 것까지 지워버립니다. 하지만 살았던 집들은 거의 다 기억하고 있어요. 어느 집이 먼저였고 나중이었는지는 조금 헷갈립니다. 한 칸짜리 방에 작은 부엌이 딸린 집들이었죠. 2년마다 새로운 집으로 떠났고, 또 거기에는 이야기가 쌓여가고 있었네요.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글로 써보니 생각나는 일들이 하나 둘 떠오릅니다.
참으로 다양한 집에서 살아봤습니다. 아마도 가난한 집의 다양한 형태라고 봐야겠지요. 맨 처음 살았던 집은 마당에 공동 수도가 있었고, 화장실도 여러 집이 함께 사용하는 곳이었어요. 잠자는 공간만 분리된 공동주택이었죠. 저녁때면 밥을 짓겠다고 모두들 마당으로 나와 순서를 기다리며 쌀을 씻었던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없지만, 안 좋은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옆방에 홀로 살고 있던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요. 저와 언니들에게 잘해줬어요. 특히 저에게 예쁘다며 맛있는 것도 주고 그랬죠. 어느 날인가 그 남자 방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잘해주던 그 남자가 좋아서 제가 알아서 간 건지 아니면 저를 부른 건지 확실치 않지만요. 나른한 오후였던 것 같아요. 혼자 있던 그 남자는 갑자기 저에게 비행기 태워준다면서 누워서 두 다리로 저를 번쩍 들어 올렸지요. 전 날아가는 기분을 느끼며 즐겁게 웃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그 남자가 갑자기 저를 자기 배위로 떨어뜨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제 몸에 자신의 성기를 비벼대더라고요. 처음엔 몰랐어요. 그냥 재밌게 떨어뜨리는 줄만 알았거든요. 근데 그런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기에 저는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어요.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곤 더 이상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았죠. 싫어하는 저를 살살 댈래며 더 태워주겠다는 걸 뿌리치고 저는 그 남자의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후론 그 방에 절대 가지 않았어요. 그런 행동이 뭔지 잘 몰랐지만, 기분 나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또다시 그 남자 방에 들어간다면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모를 것 같아도 다 알더라고요. 저 역시 그랬어요. 알겠더라고요. 그 남자의 행동이 더럽고 지저분한 행동이라는 걸요.
어릴 적부터 불편한 건 바로바로 말하던 제 성질머리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속으로 꿍하고 말 못 하는 아이였다면, 그리고 그 남자가 더 못된 인간이었다면, 저 역시 어린 시절 가까운 지인에게 성폭력을 당했을지도 모르잖아요.아이가 있는 힘껏 자기감정을 표현할 때 억누르지 말고 그 감정을 인정해 주라는 오은영 선생님의 말이 옳았네요. 그런데 당시엔 저에게 누가 그런 걸 가르쳐주진 않았을 거예요. 짐작해 보면요. 엄마를 일찍 여윈 저를 가엽게 여겨, 조금 투정 부리고 까칠하게 굴어도 좀 많이 봐줬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아고 우리 아기'란 말을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들었었거든요. 15년, 13년 터울이 나는 큰언니와 둘째 언니에게 저는 마냥 아기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조금 더 커서는 혼도 나고 맞기도 했어요. 하도 고집 피우고 찡얼거려서요. 지금은 저희 집 둘째에게 복수를 당하고 있습니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고집세고, 생떼 피우고, 울기도 잘해서 제가 아주 죽을 맛입니다. ㅋ
일곱 살이었는데 그 공동 주택에서 있었던 다른 일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것만, 그 일만큼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 남자의 얼굴은 잊었어도. 살갗이 닿았던 느낌과 두 다리, 갑갑하게 느껴졌던 그 사람의 방, 억지로 나를 달래며 계속 비행기를 태우던 모습까지도요. 그러니 실제로 무서운 일을 당한 어린아이가 평생 동안 떨쳐버릴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건 당연하게 느껴집니다.어쩌면 저 역시 그런 기억 때문에 낯선 남자가 보이면 무조건 뛰는 버릇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어요.
시골을 떠나와 인천으로 이사 온 육 남매가 처음으로 살았던 공동주택,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해야만 했던 불편함을 참고,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었죠. 더 나은 집을 얻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면서요. 그곳에서 좋은 추억을 얻지 못한 게 속상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