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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May 24. 2023

비행기를 태워줬던 이웃집 남자

얼굴은 잊었어도 그의 변태적인 행동은 영원히 잊히지 않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자주 이사를 다녔습니다. 전세 계약 2년을 채우고 떠난 집, 1년 만에 나온 집, 2년을 연장해 4년을 살다가 나온 집까지 합하면 8번에서 10번 정도 다닌 것 같네요. 당시엔 이번이 일곱 번째야 하면서 수를 헤아려보기도 했는데요. 시간은 힘이 세서 잊지 말이야지 결심한 것까지 지워버립니다. 지만 살았던 집들은 거의 다 기억하고 있어요. 어느 집이 먼저였고 나중이었는지는 조금 헷갈립니다. 한 칸짜리 방에 작은 부엌이 딸린 집들이었죠. 2년마다 새로운 집으로 떠났고, 또 거기에는 이야기가 쌓여가고 있었네요.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글로 써보니 생각나는 일들이 하나 둘 떠오릅니다.



참으로 다양한 집에서 살아봤습니다. 아마도 가난한 집의 다양한 형태라고 봐야겠지요. 맨 처음 살았던 집은 마당에 공동 수도가 있었고, 화장실도 여러 집이 함께 사용하는 곳이었어요. 잠자는 공간만 분리된 공동주택이었죠. 저녁때면 밥을 짓겠다고 모두들 마당으로 나와 순서를 기다리며 쌀을 씻었던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없지만, 안 좋은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옆방에 홀로 살고 있던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요. 저와 언니들에게 잘해줬어요. 특히 저에게 예쁘다며 맛있는 것도 주고 그랬죠. 어느 날인가 그 남자 방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잘해주던 그 남자가 좋아서 제가 알아서 간 건지 아니면 저를 부른 건지 확실치 않지만요. 나른한 오후였던 것 같아요. 혼자 있던 그 남자는 갑자기 저에게 비행기 태워준다면서 누워서 두 다리로 저를 번쩍 들어 올렸지요. 전 날아가는 기분을 느끼며 즐겁게 웃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그 남자가 갑자기 저를 자기 배위로 떨어뜨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제 몸에 자신의 성기를 비벼대더라고요. 처음엔 몰랐어요. 그냥 재밌게 떨어뜨리는 줄만 알았거든요. 근데 그런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기에 저는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어요.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곤 더 이상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았죠. 싫어하는  저를 살살 댈래며 더 태워주겠다는 걸 뿌리치고 저는 그 남자의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후론 그 방에 절대 가지 않았어요. 그런 행동이 뭔지 잘 몰랐지만, 기분 나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또다시 그 남자 방에 들어간다면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모를 것 같아도 다 알더라고요. 저 역시 그랬어요. 알겠더라고요. 그 남자의 행동이 더럽고 지저분한 행동이라는 걸요.



 어릴 적부터 불편한 건 바로바로 말하던 제 성질머리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속으로 꿍하고 말 못 하는 아이였다면, 그리고 그 남자가 더 못된 인간이었다면, 저 역시 어린 시절 가까운 지인에게 성폭력을 당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이가 있는 힘껏 자기감정을 표현할 때 억누르지 말고 그 감정을 인정해 주라는 오은영 선생님의 말이 옳았네요. 그런데 당시엔 저에게 누가 그런 걸 가르쳐주진 않았을 거예요. 짐작해 보면요. 엄마를 일찍 여윈 저를 가엽게 여겨, 조금 투정 부리고 까칠하게 굴어도 좀 많이 봐줬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아고 우리 아기'란 말을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들었었거든요. 15년, 13년 터울이 나는 큰언니와 둘째 언니에게 저는 마냥 아기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조금 더 커서는 혼도 나고 맞기도 했어요. 하도 고집 피우고 찡얼거려서요. 지금은 저희 집 둘째에게 복수를 당하고 있습니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고집세고, 생떼 피우고, 울기도 잘해서 제가 아주 죽을 맛입니다. ㅋ


일곱 살이었는데  그 공동 주택에서 있었던 다른 일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것만, 그 일만큼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 남자의 얼굴은 잊었어도. 살갗이 닿았던 느낌과 두 다리, 갑갑하게 느껴졌던 그 사람의 방, 억지로 나를 달래며 계속 비행기를 태우던 모습까지도요. 그러니 실제로 무서운 일을 당한 어린아이가 평생 동안 떨쳐버릴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건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저 역시 그런 기억 때문에 낯선 남자가 보이면 무조건 뛰는 버릇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어요.


시골을 떠나와 인천으로 이사 온 육 남매가 처음으로 살았던 공동주택,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해야만 했던 불편함을 참고,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었죠. 더 나은 집을 얻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면서요. 그곳에서 좋은 추억을 얻지 못한 게 속상한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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