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 가꾸기를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리 크지 않고 화려하지 않은 잎 위주의 화분을 종종 산다. 삭막한 집안 분위기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다. 화분 개수는 10개를 넘은 적이 없다. 스무 몇 년간 많은 아이가 내 품에 왔다가 말라 죽거나 시들어서 내 손으로 갖다 버렸다. 그 와중에 끈질기게 20년 넘게 내 곁에 남아 있는 아이가 둘 있다.
이 둘의 이름을 지금까지 몰랐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고, 관심사가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 내 성향도 한몫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이름을 찾아보았다. 참 좋은 세상이다. 휴대폰으로 사진만 찍어도 이름을 떡하니 알려준다. 하나는 물 위에 떠 있는 개구리밥이고, 또 하나는 페페로미아 푸레올라타였다. 개구리밥은 부평초라고도 한단다. 부평(浮萍), 물 위에 떠 있다는 뜻. 나는 개구리밥보다 부평초가 마음에 든다. 기준은 없다. 그냥 내 느낌이다. 페페로미아 푸레올라타는 줄리아 페페 또는 아몬드 페페라고도 한다. 짧은 이름이 있어 너무 다행이다. 둘 중 줄리아는 ‘줄리’가 왠지 구미가 당기지 않고, 이 글에서는 아몬드 페페라고 부르겠다.
부평초는 2003년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고 남편 친구가 하는 카페에서 건져왔다. 추울 때였는데, 밖에 있는 물확 위에 애기 손톱만 한 것들이 올망졸망 귀엽게 떠 있었다. 그런 분야에 게으른 나는 ‘아, 이건 그냥 물만 계속 부어주면 되겠구나.’ 싶어 가져왔다. 아몬드 페페는 이사 온 다음 해 봄쯤 동네 꽃집에서 샀다. 아, 이 아이도 남편 친구가 하는 곳이었네. 아무튼 그곳에서 어른 밥그릇만 한 플라스틱 화분 속에 들어 있던 것을 데려왔다. 한 개만 집에 두기는 너무 허전해서 3개를 샀다. 살짝 S자로 생긴 긴 화분에 3개를 넣어 지금까지 기르고 있다. 이 아이도 잊고 있다가 ‘아, 물.’ 하는 생각이 들 때만 물을 주었는데, 나름 보기 좋게 잘 크는 것이었다. 그동안 떠나보낸 식물들을 생각해 보면, 부평초도 아몬드 페페도 나랑 궁합이 맞나 싶다.
평온하게 자라던 이 둘은 각각 위기를 맞았다. 몇 년 전 한여름에 약 3주간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근근이 잊을 만하면 물을 주던 나이긴 하지만, 3주는 너무 길었다. 아는 집에 맡길까 고민했지만, “시들면 할 수 없지. 뭘 남의 집에 맡겨.” 하는 남편 말에 그만두었다. 둘 다 물을 듬뿍 주고 3주 만에 집에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아몬드 페페는 끄떡없었는데, 부평초는 너무 참혹한 상태였다. 그동안 시들어 갖다 버린 식물이 얼만데 새삼 마음이 불편했다. 물은 아직 남아 있었는데 통풍이 문제였던 것 같다. 도둑이 들까 싶어 모든 문을 꼭꼭 잠그고 다녀왔었다. 그 작고 여린 잎이 물 위에서 비비꼬이고, 누렇게 변해 있었다. ‘아, 얘는 끝났구나.’ 싶어 마음이 이상했다. 긴 시간 함께한 식물이라서일까. 식물이 시들면 “사람도 죽고 사는데 뭐.”하던 나는 어디로 갔나 싶었다. 그래도 혹시 싶어 그중 상태가 좀 나은 아이들을 골라 새 물에 띄워 통풍 잘되는 곳에 두었다. 기도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새잎들이 줄기마다 새록새록 돋았다. 너무 다행이고 진심으로 기뻤다. 법정 스님께서는 그 유명한 ‘무소유’의 의미를 난을 통해 터득하셨다고 한다. 집착을 버리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난을 친구에게 넘기셨는데, 어디를 가나 집에 있는 난이 아른거려 집착이 괴로움임을 절절히 느끼셨다고 한다. 나는 법정 스님 글이 참 좋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글이 좋은 건 좋은 거고,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을 보아 나에게 무소유는 아직 멀고도 먼 길인가 보다. 그래도 요즘 많이 언급되는 진주 어른 김장하 선생의 말로 위안을 얻는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한 번 고사 직전까지 갔던 부평초는 건재하고 아몬드 페페도 잘 자라는 듯 보였다. 그런데 약 3년 전쯤부터 아몬드 페페 잎들이 전에는 안 그랬는데 자꾸 화분 밖으로 길게 길게 자라는 것이었다. 화분 이쪽저쪽으로 너무 길게 뻗으니 너저분하고 안 예뻤다. 잎 색깔도 연한 연두색이 많아졌다. 길어지는 잎들을 가위로 머리카락 자르듯 자꾸 잘라냈다. 너무 오래 키워서(얘도 늙어서) 그런가 싶어 몇 달을 그렇게 보냈다. 하루는 물을 주다가, 이 식물을 키운 지 17년여 만에 처음 화분 속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화분 속에 흙이 거의 없었다. 흙이 이렇게 줄어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부랴부랴 아파트 화단에서 흙을 가져다 채워주었다. 그랬더니 더는 줄기가 바깥으로 길게 자라지 않았다. 나는 그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식물도 뇌가 있나, 뭔가 무섭고 섬뜩하다고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몬드 페페는 살기 위해 흙을 찾아 자꾸 바깥으로 나오려 한 것이다.
한강 작가의 책 『채식주의자』 해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식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그것은 때로 냉정한 광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욕망에 달아오른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글이 나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하다. 흙을 찾아 살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들을 내가 절망하게 만든 것만 같다. 이 일로 나도 드디어 식물에 감정 이입하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요즘 물을 주면서 그렇게 중얼거릴 수가 없다.
“아이구~ 올해도 꽃 피웠구나, 예쁘기도 해라. 내년에도 꼭 다시 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