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말로만 듣던 <죄와 벌>을 읽었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다. 독서 모임이 아니라면, 아마 나는 읽지 못했을 것이다. 책 두께도 그렇거니와 러시아 문학의 낯섦도 한몫했다. 반면 낯설지 않은 제목 <죄와 벌>은 그 단어에서 나오는 강렬함 때문에,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제목이다. 제목만으로도 이 책은 쉽게 읽을 책이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알고도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는 얼마나 많은가. 내 예상으로 이 책은 분명 괴롭게 읽을 책이었다. ‘나는 절대 죄를 짓지 않았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릴 때 유치원에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했다. 산타할아버지께서 조금 있다 오시는데 나쁜 어린이에게는 선물을 안 주신다는 것이었다. 노래 가사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그날 행사 콘셉트는 이 노래 가사 그대로였다. 생각해 보면 좋은 가사가 아니다. 내 경험이 그렇다. 그날 찍힌 사진에는 산타할아버지가 혹시라도 선물을 안 주시면 나쁜 애가 될까 긴장한 모습의 아이들이 줄줄이 앉아있었다. 산타할아버지가 나타날 때까지의 그 시간이 참으로 괴로웠더랬다. 기억에도 없는 나쁜 짓이 들통날까 마음 졸이는 그 시간이 지나고 결국 모든 아이는 선물을 받았다. 양심이라는 것이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길러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나에게는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도 전능한 존재로부터의 심판이 겁나는데, 죄를 지은 자의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일까. 하지만 <죄와 벌>의 주인공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책 초반부에 이미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다. 이 책은 그 당시 러시아의 상황이 무겁고 어두운, 살아내기 힘겨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초반에 그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에는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너무 많았다. 한 사람당 이름이 여러 가지였다. 속으로 ‘아놔’를 외치면서 근근이 이야기를 따라갔다. 주인공 이름만 예로 들자면,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인데, 로쟈, 로젠카, 로지카, 로지멘키, 로마느이치 등으로 불린다.
총 2권 중 1권 중반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내 머리 안에 이 소설의 대략 이야기 얼개가 짜졌다. 이 순간부터는 소설 내용에 푹 빠져버렸다.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른 후의 비정상적인 모습과 법대생다운 치밀함으로 자신이 범인임을 들키지 않고 잘도 피해 다니는 내용이다. 언제쯤 주인공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려나, 범인임을 들키려나 하는 궁금증을 따라가다 보면 지루할 틈 없이 쭉쭉 읽히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의아했던 점은 주인공이 끝까지 살인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다 읽고서도 나는 그 이유를 유추하지 못했다. 분명 대문호 작가의 의도가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손쉽게 인터넷의 힘을 빌려 알아보았다. 주인공이 살인 후 반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제시한 이론을 실험하고 정당화하려는 이성적 사고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사람을 살인함으로써 실험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성적 사고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는 이성과 그 이성은 다른 것일까, 잘 모르겠다. 또한 주인공은 인류를 평범한 자(범인:凡人)와 그렇지 않은 자(비범인:非凡人)로 나누었다. 범인은 기존의 도덕률을 지키고 살고, 비범인은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며, 새로운 세상을 위해 도덕적 제약을 뛰어넘어 범죄를 저지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살인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았다는 것. 어쨌든 이 소설의 핵심은 주인공이 행한 이성적 합리화는 실패했고, 살인 후 겪게 되는 극심한 심리적 압박과 정신적 고통이야말로 법적 처벌보다 더 무서운 벌의 과정이라고.
사실 나는 주인공보다 그 주변 인물들의 서사에 더 깊은 감정 이입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총 4번 울었다. 그냥 운 것이 아니고 꺽꺽거리며 울었다. 등장인물 중에, 전처와의 사이에서 ‘소냐’라는 18살 딸이 하나 있는 술주정뱅이가 있다. 그 딸은 몸을 팔아 아버지와 새엄마, 새엄마가 데리고 온 3명의 동생을 먹여 살리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그 딸이 벌어온 돈마저 술로 탕진하며, 술의 힘으로 삶을 버티는 자다. 소냐의 새엄마는 귀족 출신으로 폐병을 앓고 있다. 4번 운 것 중 3번이 이들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이다.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는 이들의 대사가 애처로워서 울고 너무 처참해서 울었다. 앞으로도 희망이 없어 보여서 울었다. 이 부부가 악다구니 떨면서도 어쩌지 못해 함께 사는 것이 이해되어 마음 아팠다. 술주정뱅이는 결국 달리는 마차에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려 한다. 그가 죽기 직전에 폐병을 앓는 아내와 그의 딸 소냐와의 대화가 나를 펑펑 울렸다. 술주정뱅이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내도 숨을 거둔다. 하루하루 지옥에 살았지만, 그들이 서로 사랑했음이 느껴져서 울었다.
4번째 울음보가 터진 장면은 주인공이 자신의 죄로 인해 다시는 어머니를 볼 수 없음을 알고 “엄마, 나에 대해 무슨 말을 듣더라도 나를 지금처럼 사랑해 주실 거죠? 엄마의 아들은 지금 엄마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해요. 내가 매정한 자식이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전부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언제까지나 엄마를 사랑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모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운다. 이때까지는 그다지 감정이 일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엄마에게 그리 모질게 굴더니 갑자기? 이런 생각만 드는 것이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놀라지도 않고 이것저것 캐묻지도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떤 무서운 순간이 닥쳐왔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엄마가 말한다. “로쟈, 요 귀여운 것, 내 첫 아이야.” 나는 ‘내 첫 아이야’ 에서 터져 버렸다.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난다.
죄를 저지른 주인공에게 가장 큰 형벌은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으로 인해 크나큰 고통을 겪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벌도 벌이 아닐 것이다. 무슨 데미지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 책의 마무리가 너무, 너무 가볍게 끝난 느낌이다. 모든 내용이 무겁고 어둡고 침울해서, 나는 우울감까지 느꼈는데, 마지막 에필로그의 그 마무리는 과장 좀 보태서 ‘참을 수 없는 마무리의 가벼움’이었다. 천사 같은 소냐의 열성으로 주인공에게 종교적 구원이 열리는 듯한 것으로 끝난다. 열심히 보던, 끝내주게 재미있던 드라마의 마지막 회가 늘 싱겁게 끝나듯이 이 책도 그렇다. 그 점이 쪼매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