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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공부 따위 안한다네

책상에 앉아만 있는다고 세상이 변할까?

by 쓰는 인간

어릴 적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소소함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삼국지 만화책이었다. 고작 학교 도서관에서 읽는 시간이 전부였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당시 부모님께선 글자보다 그림이 많은 책은 절대로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당시 남학생 대부분이 그랬다. ‘적벽대전’이라던지, ‘도원결의’ 혹은 ‘삼고초려’ 같은 유명한 에피소드가 들어있는 파트는 손때가 많이 묻은 수준을 넘어 서로 가져가 읽으려고 하는 바람에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쟁통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이야기를 잘 살려 읽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내 친구가 도서관에 남학생들을 앉혀놓고 공연(?)을 펼쳤다. 아직 영화에 소리가 들어가기 전 있었다던 변사가 그런 모습이었을까? 점심을 마시는 듯 해치우고 도서관에 앉은 망아지들은 입 하나에서 나오는 여러 영웅들 이야기에 홀려버렸다.



그 중 압권은 ‘조조였다. 어딘가 따뜻한 유비를 표현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마도 잘 알려진 ‘난세의 간웅’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겠지. ‘간웅’ 이 말은 묘하다. 과연 '난세의 간웅'이란 평가는 대체 무슨 뜻일까? '간웅 조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삼국지를 유심히 읽었던 사람들은 조조가 그다지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이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난세의 간웅’이라는 말 역시 그에 대한 비난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조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 문장은 후한 조정 관료였던 ‘교현’이 내린 평가다. 통념과 달리 이는 ‘조조가 간사하며, 교활한 인물이다‘라는 뉘앙스가 아니다.



조선 현종 때 일이다. 인조의 계비였던 조대비가 승하한 뒤 상례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크게 대립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사를 수강했다면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예송논쟁’이다. 1659년에는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에 대해 다투었다. 이에 대해 후대는 '당시 조선이 병자호란이라는 난세를 겪은 후 구습에 메이는 어리석음을 범했다.'고 평한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도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 탁상공론만을 주고받았다. 모든 말들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말이 필요했다. 교과서에 얽매어서는 현실 앞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



‘난세의 간웅’이란 기존의 신념을 현실에 맞춰 응용할 수 있는 창의적 소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간웅 조조, 그는 책상에 앉아 누구나 입으로 뱉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실현 가능한 방법을 선택했다. 남들처럼 가문이나 조상을 보고 사람을 등용하는 대신,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오로지 재능과 실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뽑았다.



우리는 왜 삼국지를 놓지 못하는가? 왜 당신은 ‘영웅’을 보며 벅차오르는가? 여전히 영웅을 꿈꾸는 이유는 지금 우리 현실이 난세이기 때문 아닐까?



영웅은 마냥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며 이론에 심취해 자기 위로하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교과서만 들여다보는 사람은 영웅이 될 수 없다. 삶의 문제는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아니라 전쟁같이 치열한 현실에서 풀어가야 하는 실제니까.



마스크가 얼굴에 붙었다고 착각할만한 이 시대만 ‘뉴노멀’은 아니다. 노멀, 우리가 기준 혹은 표준이라고 불러왔던 일상은 그만큼 자주 변해왔다. 교과서를 집어 던지고 밖으로 나가라. 책상에서 말할 수 있는 최고는 잊어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디딘 땅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영웅은 공부 따위 하지 않는다. 공부가 책상에 앉아 허울 좋은 소리만 해대는 일이라면, 그저 교과서에 코 박고 이론에만 심취하는 일이 공부라면, 영웅은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영웅은 공부 따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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