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괜찮다,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아도.

무언가 되지 않은 당신에게

by 쓰는 인간


"아니, 이거 몰라?"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뭔가를 설명하기 위해 마침 ‘게임을 좋아한다’길래 스타크래프트 속 유닛을 예로 들었다. ‘아, 정말 찰떡같이 설명했다’ 생각했는데, 그건 ‘개떡’이었다.




‘저흰 스타크래프트 잘 몰라요. 안해봤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거든. ‘이런 게 세대차이구나‘ 생각했다. 고작 5-6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내가 (많이 해보지는 않았어도) 알고 있는 게임을 모른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엥? 이 노래를 안다고?"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랑은 조금 다르지만 선생님께 배웠다며 율동도 곧 잘한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이제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유튜브나 트위치, 혹은 뭐 다른 플랫폼으로 가사를 바꿀 만도 하지만, 여전히 이 어린아이도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다고 노래를 부른다.



나와 적어도 20년은 더 차이가 나는 그 꼬마가 같은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노래는, 특별히 동요는 시대가 지나도 계속해서 불리고 또 불리기 때문일 것이다. 동요는 세대 차이가 없다. 할아버지가 한번쯤 불러봤을 노래를 손자도 들어봤고, 아빠 엄마 역시 흥얼거렸음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어린이들의 꿈과 의욕을 담고 있으면서 어린이들에 의해 불리는 어린이들의 노래’



사전에서 동요를 찾아보니 이렇게 나왔다. 뒤에 '어린이들에 의해 불리는~'이라는 정의는 차치하고, ‘어린이들의 꿈과 의욕을 담고 있다’는 것에 공감이 되었다.




어쩌면 유치원생 시절, 우리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노래하면서 어떤 꿈과 의욕을 가슴에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이 아니더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로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어린이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장래희망은 무엇이었나요?



"제 꿈은 과학자입니다. 전기 자동차를 만들어서 매연을 줄이고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자라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우리나라를 더 강하고 멋진 나라로 성장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때가 아마 미술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아닌가? 환경미화 시간이었나? 시간이 지나 기억을 흐릿하지만, 교실 뒤편 게시판에 우리의 미래가 알록달록 크레파스로 색칠되어 빛나던 그때를 기억한다. 미래의 모습을 맘껏 상상하고 최대한 멋지게 그리고 색칠했다.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기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목청껏 외쳤다.



내가 기억하는 나는 아마 처음에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제대로 과학에 대해 몰랐을 때다. 이후 내가 완전 ‘문과형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내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웠지만, 나는 어렸을 때만 해도 ‘과학상자’ 대회도 나가고 정말 앞으로 나 자신이 과학계의 큰 인물이 될 거라 믿으며 꿈을 꾸었다. 그래, 그런 때가 있었다.



"이모는 커서 뭐 될 거야?"

"이모는 다 컸어."

"그럼 이모는 뭐 된 거야?"



인터넷을 하다 어디선가 스쳐 본 어떤 ‘조카와 이모의 대화’다. 이 글 밑에 달린 ‘아, 나는 저런 이야기를 듣기 전에 뭔가 되어야겠다.’라는 댓글에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글쎄, 무언가 되어야 좋은 사람인 걸까? 뭔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어쩌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노래했던 것은 ‘무엇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냥 아무나 돼.”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JTBC의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한끼줍쇼’에 출연했던 이효리가 꼬마 아이에게 해준 말이다. 길거리에서 한 초등학생 아이를 만난 패널들은 한 마디씩 하는데, 먼저 강호동이 "어떤 사람이 될 거예요? 어른이 되면?"라고 운을 뗀다. 옆에 있던 이경규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거들자 이효리가 한 말이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였다.



생방으로 이 장면을 보진 못했지만, 한참 동안 그녀가 해준 말이 나에게도 맴돌았다.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라고 나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글을 쓰는 시점으로 이제 다음 주면 2020년 11월이 시작된다. 내년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시기가 온다. '내년엔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른이 되면 무언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 나는 미래를 ‘설렘’으로 받아들였는데, 막상 어른이 되니 그렇지 않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감싸 쥐는 것이 어른의 삶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차라리 나는 ‘피터팬의 친구라도 되게 해달라’고 빌어야 했을까?


장미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장미는 그저 피기에 피어날 뿐

결코 왜라고 묻지 않고 사네.

자기 스스로를 개의치 않으니

사람이 보는지 마는지 묻지도 않네.'



17세기 독일의 시인 앙겔루스 실레시우스의 시가 눈에 밟혔다. 그래, 사실 생각해보면 꽃말이니, 꽃의 이름이니 그저 다 인간들이 지어준 것들이다. 누구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꽃은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할미꽃이라고 불리는 그 꽃은 '이름이 이게 뭐냐'며 화를 냈을 터.



그래, 꽃은 피어났으니 꽃이다. 장미만 그렇겠나? 그네들은 결코 애쓰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을 피워낼 뿐이다. 사람이라고 다를까? 다 똑같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일까?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이 입체적이듯, 삶은 모두 다 제각기 독특하다. 무엇이 되어 누구라고 불리지 않아도 인생은 누구나 의미 있다.



그러니 살아라. 그저 오늘 하루도 살아라. 그거면 된다. 꽃이 자신을 피워내면 그것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 그저 묵묵히 살아내는 거다. 괜찮다. 굳이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아도. 누구의 아무개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살아있기에, 오늘도 묵묵히 내 자리에서 하루를 보냈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괜찮다.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되지 않아도. 당신은 당신이기에 소중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