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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Oct 01. 2021

코앞의 일도 모르면서

청강사자현부전

‘현부’(거북을 의인화 한 표현)가 어디 출신인고 하니,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다만, 그 조상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자면, 형제가 열다섯이며, 모두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어찌나 크고 힘이 좋은지 상제께서 바다 가운데 있는 다섯 개의 큰 산을 떠받혀 달라 부탁하시었다.


   그러나, 그 큰 몸집이 후대에 이르러서는 작아진 바, 힘쓰는 자들이 없어졌더라. 이제 무엇으로 먹고살꼬? 하더니, 아 글쎄! 점치는 일이며, 터가 길허고, 흉허고 하는 것을 그리 잘 맞추는 것이라. 하지만 좋은 터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통에 도대체 고향이나 집안 내력이 어떠한지 알 길이 없더라.


   현부의 조상을 아는 대로 말하자면, 가장 먼 조상은 문갑이라. 요임금 시절 낙수(중국 산시 성과 허난 성 사이를 흐르는 강)에 은둔하여 사는 바, 그가 어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임금께서 귀빈으로 초대하셨더라.


   이에 문갑이 임금께 바칠 귀한 그림을 등에 지고 오니, 임금 보시기에 어찌 기특하지 않으랴! 이에 문갑에게 ‘낙수 후’라는 벼슬을 내리셨다.


   현부의 증조부를 말하라면, 그 이름을 아는 자가 없는데.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상제의 사자’라고만 했기 때문이라. 이 누구인고 하니, 그가 바로 우임금에게 홍범구주(중국 하왕조의 우임금이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원칙)를 전한 자였다.


   조부는 누구인가 하여 살펴보니, ‘백악’이라. 곤오 국에서 무쇠솥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자요, 아비는 ‘중광’이라. ‘나를 얻으면 평민은 제후가 되고, 제후가 나를 얻으면 왕이 되리라’는 글귀가 양쪽 옆구리에 적힌 채로 태어난 자였더라.


   이러한 내력을 타고났으니, 현부는 참으로 차분하며 마음 또한 넓은지라. 나이가 들어 역법과 예언서를 공부하니 하늘, 땅의 조화며 모든 길흉화복을 미리 아는 지혜를 얻었더라.


   이런 현부의 명성을 들은 임금이 그를 불러 쓰고자 했으나, 말하기를 “진흙 바닥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버리고 어찌 임금이 주는 벼슬을 바라겠는가!”하며 거절하니 더 이상 현부를 부를 수 없더라.


   송나라 원왕 때에 어부 일을 하는 ‘예저’라는 이가 강제로 현부를 끌고 궁궐로 오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일이 있기 전, 현부가 미리 검은 옷의 차림을 하고 임금의 꿈에 나와 이르기를 “저는 청강 사자인데, 곧 임금을 뵈려 합니다.” 하였다.


   며칠이 지나니 과연 예저가 현부와 함께 궁궐에 당도한지라. 임금께서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시었다. 현부가 임금께 공손히 아뢰기를,


   “저는 어부에게 강제로 끌려 온 것입니다. 다만 임금님을 한번 뵙고 가려하는 것이지, 무슨 벼슬을 바라고 온 것은 아닙니다. 어찌 저를 놓지 않으려 하십니까?”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현부를 보내려 하였으나, 신하 위평의 간언을 듣고 결국 현부에게 벼슬을 내리셨다. 그때부터 현부는 나랏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늘의 해와 달, 별을 보고 앞일을 내다보는 일로부터 나라에서 시행하는 작고 큰 모든 일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 그러던 어느 날 현부에게 임금께서 이리 농을 하시었다.


   “그대는 신령의 후손이며, 길흉에도 밝은데, 어찌 예 저에게 잡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고?”


   그 말을 듣고 현부가 공손히 대답하기를, “사리에 밝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지혜가 많아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하였다.


- 이규보, ‘청강사자현부전 -



   “알겠지? 차근차근히 해!”


   중학생 시절, 영어 시험 보는 날만 되면 어머니는 학교 가기 전 나를 잡아 세우시곤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겉 넘지 말고 천천히 문제를 읽고 답을 고르라’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이런 말을 신신당부하신 대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영어를 잘했다. 고등학교 땐 물론이고, 중학교 때부터 영어경시대회에 나가 상을 타곤 했다.


   이런 나에게 시골 중학교의 영어 시험은 솔직히 지루한 수준이었다. ‘별 거 없네’ 생각하며 좋은 말로 하면 파죽지세로 문제를 술술 풀어나갔다.


   하지만, 도 대회 입상까지 척척 해내던 내 영어 내신 성적은 의외로 만점이 아니었다. 차근차근 살피지 않으니 알고 있는 문제도 틀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던 거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영어 선생님은 ‘너도 만점을 못 맞을 수 있구나’ 하시며 놀라워했고, 친한 친구들은 킥킥대며 놀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이런 내 모습이 아쉬우신 까닭에 적어도 몰라서 틀리는 건 혼내지 않을 테니, 아는 문제는 틀리는 일 없도록 자만하지 말고 천천히 문제를 풀라고 늘 말씀하셨다.


   현부는 대대로 점치는 일을 해왔고, 길흉화복을 미리 볼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예견하는 데는 실패했고, 그토록 거부했던 벼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처럼, 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실수할 때가 있다.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현부처럼 겸손할 수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일에 정통했던 현부가 이런 태도를 지녔다면, 3초 뒤도 모르는 우리야 오죽할까? 청강사자현부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코앞에 닥칠 일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재주가 아무리 좋고 아는 것이 많다 한들, 실수할 수 있으니 겸손해야 한다. 끝으로 잉글랜드 배우 George Arliss의 문장을 가지고 마무리를 하고 싶다.


‘겸손은 인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변화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 주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지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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