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인간 Nov 07. 2021

도태가 된 태도

장끼전

“아이고, 아이고! 운명이라는 것이 어찌 이리 가련한 고!”


하얀 눈이 내린 산기슭에 까투리(꿩의 암컷을 부르는 말)가 주저앉아 있다. 가슴을 치며 오열하는 그에게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추운 겨울이 오면 산은 그야말로 눈밭이 된다. 문제는, 그 하얀 눈 밖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달렸던 탐스런 열매는커녕, 울긋불긋했던 나뭇잎조차 사라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이 계절이 오면, 산과 들에 사는 짐승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자, 너희는 저쪽으로 가거라. 혹시 콩 한쪽이라도 보거든, 다른 짐승이 먹기 전에 얼른 주어 먹어라. 알겠지?”


“예, 아부지.”


   저 산속 깊은 곳에서 아주 작게 눈 밟는 소리가 들리기에 무엇인가 하고 보았더니, 장끼(꿩의 수컷을 부르는 말)와 까투리, 그리고 그 새끼들이라. 제일 앞서 걷는 장끼의 옷매무새를 보니, 붉은 비단 저고리에, 둥근 무늬 깃을 멋지게 달고 머리에는 주먹만 한 옥관자(망건에 다는 고리)를 달았으니, 가히 그 차림새가 화려하고 늠름하더라.


   그에 반하여 뒤에 따르는 까투리를 보니, 솜을 넣어 바느질 한 누비옷을 위아래 입은 모습이 참으로 소박하였더라. 그렇게 왼쪽으로 자식들을 보낸 장끼와 까투리는 반대쪽으로 걸어가 이곳저곳을 누비는데, 무엇하나 찾을 수 없이 온통 눈뿐이니, 고요한 산속에는 장끼와 까투리 배곯는 소리만 들리더라.


“아, 참으로 하늘이 이 몸을 버리지 이니 하였구나!”


   눈밭에 덩그러니 놓인 콩 한쪽을 먼저 발견한 것은 앞서 가던 장끼였다. 온통 하얀 세상에 붉은 점 같은 것이 있어 무엇인가 하여 보았더니, 붉은 콩이 아닌가. 사흘은 족히 굶었으니, 콩이 탐스럽게 보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눈 위에 보니 누가 불고 쓸어놓은 것 같아요. 사람이 짐승을 잡기 위해 놓은 덫이 분명합니다. 이 콩은 먹지 마시고, 함께 조금 더 걸어가 보시지요.”


   장끼는 까투리의 염려가 거추장스러웠다.


“여보, 그 무슨 미련한 소리인가? 사방을 둘러보게나.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 어찌 이런 깊은 산속에 사람이 무슨 재주로 들어와서 덫을 놓는단 말인가?”


“물론 그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신중하게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장끼는 계속되는 까투리의 말에 짜증이 났지만, 더 듣기 싫은 마음에 까투리를 달래듯 말하였다.


“꿈을 꾸었다고? 나도 꿈을 꾸었네. 내가 간밤에 학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네. 옥황상제께 문안을 드렸지. 그랬더니, 기뻐하신 상제께서 내게 벼슬을 내리시고, 콩 한 섬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혹 이 콩이 내 꿈속에 나온 그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내 자네 몫까지 남겨 줄 터이니, 우리 함께 배고픔을 달래 보세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투리의 만류는 계속되었다.


“제 꿈은 전혀 다르던걸요, 산에 비가 쏟아지더니, 갑자기 맑아졌어요. 쌍무지개가 뜨더군요? 그런데, 그 쌍무지개가 갑자기 칼로 변하더니, 당신 목을 댕강 내리치는 게 아니겠어요? 너무 놀라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장끼는 ‘그 꿈은 장끼가 장원급제하여 어사화를 꽂고, 도시를 활보하는 꿈’이라며 받아쳤지만, 까투리는 ‘그다음엔 당신이 무쇠 가마를 머리에 쓰고 깊은 물속에 가라앉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까투리가 꿈 이야기를 하면, 장끼는 그 꿈은 불길한 꿈이 아니라며 말을 돌려대는 것을 반복했다. 까투리가 과부가 되어 상복을 입고 엉엉 울었다며 마지막 꾼 꿈 이야기를 하자, 장끼는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버럭 화를 내며,


“그것은 여시 같은 계집년이 자기 남편 버리고, 외간 남자하고 히죽히죽 잘 놀다가 굵은 줄로 몸을 결박당해 큰 거리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몽둥이찜질당할 꿈이로다! 내가 자네 정강이를 분질러 버리는 것이 싫거든 다시는 그 따위 꿈 타령하지 말게!”


   말하고는, 망설임 없이 콩을 콕 찍는데, 바로 그 순간 산이 무너지는 듯 큰 소리가 나니, 사냥꾼이 놓은 덫이 장끼를 덮쳤더라. 까투리는 꿈이 이루어진 줄을 알고는 눈물을 흘리며 ‘계집 말 무시하더니 집안이 무너지게 생겼다’고 한탄했다.


   엉엉 우는 까투리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끼는 숨을 헐떡이며, ‘자네가 원통하면 나보다 더 원통 하겠냐’며 수절하여 열녀로 살아달라고 말을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때 족제비 가죽 모자를 쓰고 성큼성큼 달려오는 이가 있었으니, 덫을 놓은 김 첨지였다.


   그는 덫에서 장끼를 빼내 들고는 춤을 추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끼를 잡아 신이 난 그는 ‘까투리도 걸리게 해 달라’는 기도도 빼놓지 않았다. 까투리는 눈물을 삼키며 장끼의 깃털을 주어다가 묏자리를 만들어 거기 묻었다.


   가랑잎에 이슬을 받아 도토리 잔에 따라놓았다. 잎대로는 수저를 만들었다. 산의 새들이 장끼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 까투리를 도와주었다. 두루미는 술잔을 올리는 제관을, 제비는 손님 맞는 일을, 앵무새는 음식을 차리는 일을 맡았다. 따오기가 제사상 앞에 조심히 꿇어앉아 축문을 읽었다.


   이렇듯 장끼의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 각종 새들이 찾아와 까투리에게 온갖 추파를 날렸다. 하지만, 까마귀도, 물오리도 까투리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죽은 남편의 말을 따라 수절하려는가 하였더니, 바로 그때 당당한 모습의 장끼가 나타났다.


“그동안 마땅한 짝이 없이 외롭게 지냈는데, 혹 당신이 과부가 된 것이 하늘이 내게 배필을 내린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우리 둘이 짝을 지어 아들 딸 낳고 백년해로 하는 것은 어떠하오?”


   장끼의 늠름한 모습이 싫지 않았던 까투리는,


“죽은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나이가 젊으니 혼자 살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당신을 보니 함께 살 마음이 들고 듬직해 보이는군요. 홀아비와 과부가 정을 나누는 것은 당연하고, 예부터 유유상종이라 하였으니, 까투리가 장끼를 따라가는 일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며 장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모습을 본 까마귀와 물오리는 무안하여 자리를 떠나버렸고, 조문 왔던 손님들도 모두 자기 길을 갔다. 까투리는 새 남편을 따라 자식들과 더불어 숲 속으로 들어갔다.


- 작자 미상, 장끼전 -


“엄마, 저게 뭐야?”


   지금도 외할머니가 사시는 동네에 가면 빨갛게 칠하여 세워놓은 ‘열녀문’이 있다. 어머니는 열녀문을 모르는 내게 ‘옛날에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아주머니가 있으면, 열녀문을 세웠다’고 말해주었다.


“왜 열녀만 있지?”


   외할머니 댁을 오고  때마다 보이는 빛바랜 열녀문을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하는 가련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열남은 없나?’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남편이 죽은 후에 수절하거나, 위난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 열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이 말하는 ‘열녀’의 뜻이었다. ‘열남’을 검색해보았다.


‘미디어 검색 결과 (0개)’

‘백과 항목 검색 결과 (0개)’


   열녀는 있는데, 열남은 없었다. 유교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에게는 남편에 대한 순종과 수절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이는 삼종지도(三從之道,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 같은 하나의 도덕규범으로 체계화되었다.


   마을에서는 이런 규범을 지킨 여인을 ‘열녀’로 높이고, 그 마을에 열녀문을 세웠다고 한다. 반대로 남편의 죽음 이후 재혼한 여성의 자손은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의 개혁 지식인으로 꼽히는 실학자 이익은 ‘남편이 죽어도 개가(다시 결혼을 하는 일) 하지 않는 여성이 양반뿐 아니라, 전 계층으로 확대되는 모습은 중국도 따라오지 못하는 아름다운 풍속’이라고 한 바 있다.


   장끼전은 이런 관습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아내이며 여성을 상징하는 까투리는 장끼에게 ‘콩을 먹지 말라’며 끝까지 소리를 높인다. 그의 말을 무시한 장끼는 덫에 걸려 죽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장끼는 까투리에게 ‘자기가 더 원통하다’며 수절하여 열녀로 살아 달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까투리가 끝까지 수절하거나, 혹은 개가하였다가 다른 새들의 흉에 못 이겨 자살하는 결말을 맺은 판본도 있지만, 소개한 것처럼 다른 장끼를 만나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도 있다.


   장끼전은 본래 장끼 타령이라고 불리던 판소리 12 마당 중 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장끼 타령은 변강쇠타령, 배비장 타령, 강릉 매화타령, 무숙이 타령, 가짜 신선 타령과 함께 소리를 잃은 ‘실전 판소리’가 되어 소설의 형태로만 전해져 내려온다.


   그들은 왜 목소리를 잃어버렸을까? 일곱 마당 모두 유교적 가치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실되었다. 그 시대야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생각되었지만, 지금은 어떤가? 적어도 내용을 살펴본 장끼전 속 까투리의 말과 행동을 이해 못할 현대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전통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전통은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영원한 전통은 있을지 몰라도, 변하지 않는 정통은 없다고 보아도 무관하지 않을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굳어진 전통만을 고집하는 태도는 도태가 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 이 손 안에 있소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