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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Feb 10. 2022

잘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한 가지

토끼의 재판

“거기 누구 없소? 나 좀 살려주시오! 꺼내 주시오!”


산길을 지나고 있는 한 나그네의 귓가에 도움을 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그 목소리는 분명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건?!”


   소리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 보니, 어디서 이런 게 생겼나 할 정도로 크고 깊은 구덩이가 보였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는 분명 거기서부터 기어 나오고 있었다. 나그네가 허리를 굽혀 구덩이를 들여다보는 순간, 그는 다시 놀라고 말았다.


“아니, 네가 어쩌다가?”


   구덩이에 빠진 건, 얼룩덜룩한 몸에 꼬리는 한 발이 넘는 집채만 한 호랑이였다. 두 눈이 이미 벌건 것이,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이미 서럽게 한 바탕 통곡이라도 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그네는 가슴 한 구석에서 측은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랑이가 나그네를 발견하고는 애걸복걸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이고, 선생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여기서 꺼내 주시기만 한다면, 제가 그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나그네는 쩍 벌어진 호랑이의 주홍 입을 보고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걸 눈치챈 호랑이는 결코 은인을 잡아먹는 일은 없을 거라며 솥뚜껑만 한 두 앞발을 연신 비벼댔다. 그 모습을 보고 나그네는 안심이 되었는지, 긴 나무를 구덩이 속으로 내려주었다.


   그러자 호랑이는 새 낫 같은 발톱을 세우고는 나그네가 내려준 나무 위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거기 있었냐는 듯, 호랑이는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기지개를 켰다.


“아이고, 온종일 갇혀 있었더니 배가 고프구나. 네놈을 잡아먹어야 이 배고픔이 좀 가시렸다?”


   산천을 뒤흔드는 큰 울음소리를 내며 호랑이는 당장 나그네를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댈  기세였다. 하지만, 나그네는 그런 호랑이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호랑이를 꾸짖었지만, 호랑이는 콧방귀를 뀌며 비웃을 뿐이었다.


“황소야, 이것 좀 보아라! 호랑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구나!”


   그러자, 나그네는 들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황소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황소는 나그네의 편이 아닌 듯했다. 씹던 풀을 뱉고는 나그네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흥, 약속은 무슨. 너희 인간들은 우리 젖을 함부로 짜내질 않나, 힘들어 죽겠는데 멍에를 매어 놓고 논이며 밭에서 하루 종일 일만 시키지 않느냐! 너도 우리 주인과 다를 바 없겠지! 나는 너를 도무지 믿을 수 없구나!”


   나그네는 포기하지 않고 저 편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에게 말을 걸어, 호랑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자신은 너무나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소나무 역시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나그네 편을 들어줄 생각일랑 추호도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우리 나무들을 함부로 베어다가 자기들 필요한 대로 가구며, 집을 만들지! 너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냐!  따위 인간은 그냥 호랑이의 밥이 되는 것이 자연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호랑이는 여유만만하게 히죽히죽 댔고, 나그네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였다. 새하얀 토끼가 호랑이와 나그네가 말싸움을 벌이는 들판 사이로 지나갔다. 나그네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토끼를 멈춰 세우고는 한 번 더 하소연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호랑이님이 어디에 빠졌었다고 하셨죠?”


   토끼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호랑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아이, 정말. 자, 토끼야! 잘 봐라.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이렇게 빠졌는데...”


   호랑이는 아까 빠져나왔던 구덩이에 다시 들어갔다. 토끼는 호랑이가 스스로 나오지 못할 만큼 들어간 걸 확인하고는 나그네에게 말했다.


“나그네님, 어서 가던 길 계속 가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호랑이 같이 저런 나쁜 놈과는 약속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나그네는 토끼에서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가던 길을 마저 부지런히 걸어갔다. 뒤에서 호랑이가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외치는 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


- 한국 고전 전래동화 중 ‘토끼의 재판’ -  


“어? 너 J 아니냐?”

“와, 형! 잘 지냈어요?”


   벌써 한참 전 일이다.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터미널 앞에서 군복 차림의 중학교 후배 J를 만났다. 입대를 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리저리 바쁘단 핑계로 편지 한 통 써주지 못하던 사이에 벌써 꽤나 짬이 찬 모양이다.


   ‘아직 식사를 못했다’는 말에 근처 식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까맣게 탄 피부에, 군모에 눌린 까까머리를 보니, 이 녀석도 영락없는 군인이다. 힘든 건 없냐고 물어보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에? 아저씨가 그랬다고?”

“아 그랬다니까요? 쪽팔리고 뻘쭘해서 죽는 줄...”


   J가 자대 배치를 받은 후였다. 아직 신병 휴가를 나가기도 전인데, 갑자기 누가 면회를 왔단다. 알고 보니 J의 아버지가 말도 안 하고 면회를 오신 거다.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저씨에게 누군가 인사를 건네더란다. 소대장이었다.


   아저씨는 뭐가 그렇게 불쾌했는지, 소대장의 인사를 받고는 갑자기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병사들 안전 관리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지적하며 똑바로 잘하라고 엄포를 놨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J는 꽤나 곤란했다고.


   나중에 J가 아버지에게 그때 도대체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니, 당신이 군대에서 선임들에게, 그리고 특히 간부들에게 부조리를 당했고, 그게 생각나 아들 걱정에 순간 욱해서 그러셨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종종 내가 겪은 것을 바탕으로 처음 보는 어떤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J의 아버지가 그랬고, 동화 속 황소와 소나무가 그랬다. J의 아버지는 자신의 경험 속 간부를 떠올리며 아들이 부조리를 당할까 걱정했고, 황소와 소나무는 자신을 못살게 굴었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곤경에 빠진 나그네를 돕지 않았다.


   하지만, J의 아버지가 윽박지른 그 소대장은 누구보다 병사들을 아끼고 존중하는 간부였고, 황소와 소나무의 판단은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그들 모두 자신의 경험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건 사실 편견에 불과했다.


   내 경험만을 맹신하고 옳다고 주장하는 편견의 태도는 사랑하는 아들을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을 수도 있고, 선량한 나그네를 하마터면 죽음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어쩌면 미국의 언론인이었던 Edward R. Murrow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 경험의 포로이며, 편견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사람을 이미 겪어본 황소나 소나무에 비해 사람을 잘 몰랐을 토끼가 가장 옳은 판단을 한 건 우연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우리는 오히려 더 모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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