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던진다!’
머리 속에 어떤 멜로디가 들린다면, 당신은 적어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넘버 중 하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본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스 원작의 소설이었던 이 작품은 1997년 4월 28일 브로드웨이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뮤지컬이 되었다.
주인공 지킬 박사는 인간이 지닌 선과 악을 분리하려는 실험을 한다. 마침내 자신을 최종 실험 대상으로 삼고 약을 투여하는 순간, 그는 지킬 박사이자 하이드 씨가 된다. 1886년 발표된 이 작품을 통해 당시 ‘다중자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어땠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제임스 맥어보이가 주연으로 나왔던 ‘23 아이덴티티’라는 영화를 아는가? 23개나 되는 인격을 가진 남성이 등장하는 영화다. 분명 한명의 남성인데, 20개가 넘는 다양한 인격들이 존재한다.
여름날 '내가 아직도 00으로 보이니?' 같은 대사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인격으로 비춰질 때 우리에게는 저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는 공포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다중자아는 전혀 다른 모습, 코미디의 옷을 입기도 했다. 얼마 전 폐지된 개그 콘서트 속 코너 ‘봉숭아 학당’에서 박성호가 맡았던 배역 중 하나였던 ‘다중이’가 그런 캐릭터였다.
2004년 3월 28일부터 2005년 6월 5일까지 출연했던 다중이는 평상시에는 어린 아이였다가 돌연 음흉한 어른으로 변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주었다.
이렇듯 '다중자아'는 지금껏 공포나 희화 어딘가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평범하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다중 자아'는 그저 두려워하거나 희화나 풍자할만한, 나와는 먼 이야기일까?
음원차트를 ‘싹쓸이’하고 활동을 종료한 신인그룹 ‘싹쓰리’가 화제다. MBC 토요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은 이효리, 정지훈(이하 비)과 함께 그룹을 결성했다.
각각 유두래곤, 린다G, 비룡으로 앨범활동을 했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재석, 이효리, 그리고 비이지만, 동시에 ‘싹쓰리 멤버’ 유두래곤, 린다G, 비룡이다. 게임 속 '본캐와 부캐'처럼 '또 다른 자아'가 있는 셈이다.
상황에 따라 역할을 달리 하는 모습은 연예인이나, 혹은 영화 속 인물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학교, 동호회, 혹은 직장에서 때와 장소에 따라 자신의 역할이나 성격을 변화시키며 여러 개의 자아를 표현한다.
여가를 이용해 직장인 동호회를 하거나 미술이나 음악을 배우는 등 취미생활을 하는 일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이런 취미는 퇴근 후 요가 강사라던지 작가로 등단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 다른 나, ‘멀티 페르소나’는 나의 이야기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은 거부감 같은 감정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개인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해였다. 어떤 선배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잘 들어. ‘일과 나를 분리하는 일’을 잘 해야 해. 오늘 상사한테 깨졌다고 쳐. ‘직장인 000이 깨진 일’을 '인간 000이 깨졌구나' 생각하면 미련한 거야. 너 자신이 깨진 건 아니란 말이야. 실수는 인정해야지. 그렇지만 너무 과몰입 할 필요 없어."
시장 조사 기관인 글로벌웹인덱스(GlobalWebIndex)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 사람이 보유하고 있는 소셜 미디어 계정은 평균 8.1개에 달한다. 이미 우리에게 다양한 계정을 통해 다양한 자아를 표출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myself’라는 말은 ‘myselves’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킬 박사가 했던 실험을 되풀이하고 있다. 굳이 선과 악을 분리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때와 장소에 맞는 페르소나를 만들고, 이용하는 모습은 더 이상 흠이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지킬 수 있는 건강한 도구이며, 건전한 배출구이다.
멀티 페르소나를 부정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물론 우리는 ‘다양한 내 모습 중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 고민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하이드 씨에게도 관심을 줄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어찌 되었든, 우리 안에 하이드 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고,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