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만 앉아 있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어릴 적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소소함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삼국지 만화책이었다. 고작 학교 도서관에서 읽는 시간이 전부였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당시 부모님께선 글자보다 그림이 많은 책은 절대로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당시 남학생 대부분이 그랬다. ‘적벽대전’이라던지, ‘도원결의’ 혹은 ‘삼고초려’ 같은 유명한 에피소드가 들어있는 파트는 손때가 많이 묻은 수준을 넘어 서로 가져가 읽으려고 하는 바람에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쟁통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이야기를 잘 살려 읽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내 친구가 도서관에 남학생들을 앉혀놓고 공연(?)을 펼쳤다. 아직 영화에 소리가 들어가기 전 있었다던 변사가 그런 모습이었을까? 점심을 마시는 듯 해치우고 도서관에 앉은 망아지들은 입 하나에서 나오는 여러 영웅들 이야기에 홀려버렸다.
그 중 압권은 ‘조조였다. 어딘가 따뜻한 유비를 표현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마도 잘 알려진 ‘난세의 간웅’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겠지. ‘간웅’ 이 말은 묘하다. 과연 '난세의 간웅'이란 평가는 대체 무슨 뜻일까? '간웅 조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삼국지를 유심히 읽었던 사람들은 여몽과 같이 학업에 열중한 결과로 ‘눈 비비고 다시 보아야 할 인물’이 등장하는 반면 조조처럼 그다지 학문에 힘쓰지 않은 캐릭터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조조의 이미지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난세의 간웅’이라는 말 역시 그에 대한 비난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조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 문장은 후한 조정 관료였던 ‘교현’이 내린 평가다. 통념과 달리 이는 ‘조조가 간사하며, 교활한 인물이다‘라는 뉘앙스가 아니다. 그러니까 말을 좀 보탠다면, ‘조조의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웩!“ “자, 봉투 줄게. 조금만 더 참아라.“ 어렸을 적 우리 가족은 여름 휴가 때 피서를 위해 동해바다로 갔다. 큰 아버지댁이 강릉이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놀러간 것이다. 그때 나와 동생, 그리고 엄마까지. 아빠를 제외하고 운전하지 않는 우리 세 사람은 대관령을 넘어가며 멀미를 하곤 했다. 지금이야 도로가 새로 깔리고 터널이 뚫려서 굳이 그 험하고 높은 고개를 빙글빙글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만, 그때만큼은 참 고역이었다. 멀미는 그럴 때 일어난다.
뇌의 예측과 눈 앞의 현실이 다를 때. 그러니까 뇌의 예상보다 생각보다 많이 흔들리거나 하면 어지러움을 느끼며 심한 경우 먹은 것을 게워내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도 다르지 않았다. 황건의 난 때문에 이미 후한은 붕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그 뿐인가? 후한이 무너지고 등장한 위, 촉, 오. 그리고 수많은 군웅할거는 이전에 누리던 평화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국면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 여전히 탁상공론만을 주고받았다. 모든 말들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말이 필요했다. 교과서에 얽매어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
마치 외부 종들이 유입되자 약한 고유종들이 멸종하거나 멸종 위기에 처했던 ‘갈라파고스 신드롬’처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기준을 세우지 못한 자들은 모두 도태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난세의 간웅’이란 기존의 신념을 현실에 맞춰 응용할 수 있는 창의적 소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간웅 조조, 그는 책상에 앉아 누구나 입으로 뱉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실현 가능한 방법을 선택했다.
남들처럼 가문이나 조상을 보고 사람을 등용하는 대신,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오로지 재능과 실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뽑았다. 그것이 한때 적이었다고 해도 능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가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초의 부하였던 방덕, 양봉의 부하였던 서황, 그리고 조조의 조카와 가장 아끼는 호위무사를 죽이기까지 했던 장수, 그리고 그의 모사 가후, 유표의 부하였던 문빙, 여포의 일족이었던 장료, 여평, 장패, 원소의 부하였던 장합이 그런 경우였다.
물론 이외에도 조조가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능력만 있었다면 편견을 갖지 않고 원수였던 자라도 등용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모두 조조의 신임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조조의 가문과 혼인까지 했고, 평생을 위나라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조조는 여포를 죽인 뒤 여포와 진궁의 일족을 돌보았다고 말한다.
원소를 멸망시킨 후에도 끝까지 저항하던 원소의 세 아들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도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게다가 그의 든든한 병력이었던 청주병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한때 피터지게 싸우던 청주의 정예 황건적들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왜 삼국지를 놓지 못하는가? 왜 당신은 ‘영웅’을 보며 벅차오르는가? 여전히 영웅을 꿈꾸는 이유는 지금 우리 현실이 난세이기 때문 아닐까? ‘미래는 무슨? 하루 살면서 적응하기도 빡센데!’ 푸념과 넋두리를 늘어놓는다면 이미 충분하다. 당신이 난세를 풀어갈 그 사람이다.
어쩌면 영웅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냐고? ‘전통’이라는 명목의 구습에 광내는 것보다 오늘에 발 맞추어 어색하더라도 한걸음 내딛는 사람이 사실은 영웅, 아니 간웅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영웅은 마냥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며 이론에 심취해 자기 위로하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교과서만 들여다보는 사람은 영웅이 될 수 없다. 삶의 문제는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아니라 전쟁같이 치열한 현실에서 풀어가야 하는 실제니까.
이런 점에서 우리의 공부는 조금 달라져야 한다. 공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고루한 옛 생각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집착이 아니라, 옛 지혜를 지금의 기준에 맞추어 다시 세우는 창조적 행위여야 한다. 마스크가 얼굴에 붙었다고 착각할만한 이 시대만 ‘뉴노멀’은 아니다. 노멀, 우리가 기준 혹은 표준이라고 불러왔던 일상은 그만큼 자주 변해왔다. 교과서를 집어 던지고 밖으로 나가라. 책상에서 말할 수 있는 최고는 잊어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디딘 땅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책상에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고한 척 한 마디 뱉는 일보다 어색하더라도 진흙탕이 된 현실에서 옆 사람과 발 맞춰 걸어가는 것이 사실 영웅이라고 조조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웅은 공부 따위 하지 않는다. 공부가 책상에 앉아 허울 좋은 소리만 해대는 일이라면, 그저 교과서에 코 박고 이론에만 심취하는 일이 공부라면, 영웅은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영웅은 공부 따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