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어우, 5분만 더요."
그 5분이 계속되길 바랐다. 요즘 같이 추운 날씨, 이불 밖으로 발을 빼면 귀신이 내 발을 당기진 않아도 그만큼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공기가 내 발목을 은근히 감싸는 그 날씨가 되면 전기장판과 이불은 어찌나 나를 그렇게 감싸고 놔주질 않는지, ‘아침 먹으라’며 깨우시는 어머니에게 ‘5분만 더 달라‘고 말했다.
뭐 그때만 그랬겠나? 지금은 어머니가 깨워주시지 않지만 핸드폰 알람은 하필 또 ‘-분 후 다시 알림’이 있어서 자꾸만 미루게 만든다. 겨울철이든 여름철이든 상관없이 ‘아, 5분만 더‘를 중얼거리면서 더 자게 만든다.
물론, 아무 일도 없는 휴일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일이 있는 날이라면 더 미룰 수 없는 때가 온다. 그걸 모르고 계속 잔다면 ‘부재중 통화 25통, 카톡 45개, 문자 18개’의 독촉을 보게 되고 당신은 경위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5분만 더요’는 정말 달콤하다. 하지만 달콤한 것이 늘 몸에 좋지 않다. 삶에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5분 더 자면 행복하긴 하겠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를 위해 해야 할 무언가를 해주지 않는다. 그래, 5분의 유혹,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그 일이 ‘머리카락 정도’ 보이는 어떤 이야기를 이제 해야 할 때가 왔다.
길동, 결심을 하다
조선 세종 때에 홍 씨 성을 가진 재상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 명문가로 유명했다. 그 제상은 어린 나이에 급제하여 벌써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니 온 나라에 그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들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인형’인데, 본처 유 씨가 낳은 아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길동’으로 노비 춘섬이 낳은 아들이었다.
첫째 아이 이야기는 접어두고, 둘째 아들이 어떻게 나왔냐, 하면은 그러니까 그것이 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홍공의 꿈에 우레와 벼락이 진동하더니 웬걸? 청룡이 공을 향하여 달려드는 것이었다. 이는 필시 좋은 꿈이기로 '내 이제 귀한 자식을 낳으리라!' 생각하고 즉시 내당으로 들어갔다.
"체통도 지키지 않으시고 이렇게 경박한 행동을 하고자 하시니, 첩은 따르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정색을 하더니 손을 떨치고 나가 버렸다. 아, 이 어찌 무안하지 않겠는가? 그저 외당으로 나와 부인의 지혜롭지 못함을 한탄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 노비 춘섬이 차를 올리기에 그 고요한 분위기 놓치지 않고 홍공이 춘섬을 이끌고 곁방에 함께 들어갔다.
그 무렵 춘섬의 나이가 열여덟이었는데, 한번 그렇게 한 뒤에 문밖에 나가지 않는 것은 물론, 타인과 접촉할 맘도 먹지 않으니 홍공이 기특하게 생각하여 애첩이 되었더라.
10달 만에 옥동자를 낳았는데, 생김새가 참으로 비범하니 영웅호걸의 기상인 것을 누가 보아도 훤히 알 정도라. 공은 한편으로는 기뻐하였지만, 그가 부인의 아들이 아님을 안타깝게 여겼다.
길동이 8살이 되자 하나를 들으면 100가지를 알 정도였다. 공은 더욱 길동을 사랑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출생이 천하였으니 한스러움 또한 깊더라.
어쩌다가 한번 공을 ‘아버지‘하고 부르거나 형을 ‘형’하면 즉시 호되게 꾸짖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니 길동은 10살이 되도록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종들은 또 그를 어떻게 대했을지는 뻔한 일이다. 그러니 그 한이 길동의 가슴을 넘어 뼈에 사무치더라.
"대장부가 태어나서 공자와 맹자를 배우지 못할 바에 차라리 병법이라도 익혀 대장군이 되어 동쪽과 서쪽을 평정하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이름을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아, 그런데 나는 어찌하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단 말인가? 심장이 터질 만큼 답답하다!"
분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달빛이 밝은 밤에 뜰에 나와 검술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공이 보고 즉시 물러 묻는다.
"너는 무슨 흥이 있어 아직도 잠을 자지 않느냐?"
길동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
"소인은 마침 달빛을 즐기고 있습니다. 만물이 생겨날 때부터 귀한 것은 오직 사람인 것인데, 소인에게는 귀함이 없으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공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책망하며 호통을 치니 길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공이 ‘물러가라’ 하자 침소로 돌아와 슬퍼했다. 그리하여 하루는 길동이 결심을 하고서 어미 침소에 가 말하였다.
“소자가 어머니와 더불어 금세에 어머니와 아들이 되었으니, 이 어찌 은혜가 깊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소자의 팔자가 좋지 않아 천한 몸이 되었으니 품에 한이 깊습니다. 장부가 세상에 살면서 어찌 남의 천대를 받고 살겠습니까? 소자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여 이제 어머니를 떠나려 합니다. 소자를 염려하지 마시고 귀한 몸을 잘 돌보십시오.”
초란의 흉계
아들이 하는 말 어머니가 들으니 크게 놀라 ‘재상가의 천한 태생이 너뿐이 아니라’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길동의 심지는 이미 굳었더라.
한편, 홍공의 댁에는 첩이 된 곡산 지방의 기생이 있었으니, 이름은 초란이라. 교만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는데, 춘섬이 길동을 낳아 홍공이 사랑하시기로 속으로 불쾌하여 길동을 없앨 궁리만 하던 차였다.
하루는 무녀를 청하여 흉계를 꾸미는데, ‘길동이 왕이 될 기상이라, 장성하면 장차 온 집안이 멸망하는 화를 당할 것이니 유념하라’고 홍공에게 흘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홍공은 ‘아차!‘ 가슴이 덜컥하여 길동을 산에 있는 정자에 머물게 하고 행동을 늘 감시하더니, 길동의 마음이 더욱 답답하였다.
그중에 초란은 홍공에게 가 ‘차라리 길동을 없애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말하는데, 홍공, “어림도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이르며 물리치더라. 하지만 가슴은 심란하니 잠을 이루지 못하여 병이 났다. 결국 초란이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니, 곧 자객이 길동이 있는 곳을 향하기 직전이더라.
'까악! 까악! 까악!'
길동은 그날 밤, 촛불을 밝히고 <주역>을 읽고 있는데, 까마귀 우는 소리를 듣고는 이상히 생각하였다.
"까마귀가 밤에 울다니 좋지 않은 징조구나."
하면서 팔괘로 점을 치니, 필시 이는 흉이라. 급히 둔갑 법으로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피는데, 사경쯤 되자 한 사람이 비수를 들고 천천히 방에 들어오는 것 아닌가? 길동이 급히 몸을 감추고 주문을 외니 집은 사라지고 바람이 사납게 불더라. 자객은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한 소년이 꾸짖는다.
"너는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무죄한 사람을 해치면 하늘이 노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주문을 외니, 검은 구름 몰려오며 큰 비가 쏟아지더라. 가만 보니 길동이니, 자객이 속으로 얕잡아 보고 덤볐다. 이에 길동도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여 요술로 자객의 칼을 빼앗았다. 단칼에 자객을 죽이고 무녀까지 그리하니 은하수는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달빛은 희미하더라. 길동의 마음이 더욱 분통하여 초란마저 죽이려 했으나, 홍공께서 그 또한 사랑하시니 차라리 달아나 목숨이라도 건지기로 생각하였다.
"밤이 깊었는데 자지 않고 왜 방황하고 있느냐?"
침소에 다다른 길동을 알아본 홍공이 물었다.
"소인이 일찍이 부모님께서 낳아주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까 하였는데, 집안에 옳지 못한 자가 있어 소인을 죽이고자 하기에,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이제 공을 모실 길이 없기에 하직을 고하렵니다."
홍공이 크게 놀라
"너는 무슨 일이 있어 어린아이가 집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다는 말이냐?" 하시니
"소인은 뜬구름과 같습니다. 버린 자식이 어찌 갈 곳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에 측은함이 들어 홍공이
"내가 너의 품은 한을 알겠다, 오늘부터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거라." 하는데.
"소자의 지극한 한을 아버지께서 풀어 주시니 저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아버지, 만수무강하십시오." 하니 길동이 마음을 돌이키지 않더라.
어머니에게도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초란은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놀랐다. 홍공은 초란이 꾸민 일을 다 알고서는 분노하여 초란을 내쫓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대는 누구길래 여기까지 왔는가? 여기에는 영웅들이 모여 있지만, 아직 우두머리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참여할 마음이 있으면 저 돌을 들어보시게."
그 무렵 길동은 어떤 경치 좋은 곳에 도착했다. 알고 보니 거기는 도적의 소굴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길동이 돌을 들어 수십 보를 걷다가 힘껏 던지기 그 돌 무게가 천 근이더라. 여러 도적들이 깜짝 놀라 ‘장군을 내려주셨다’며 우두머리로 삼았다.
하루는 여러 사람들이 제의를 하나 했는데, '합천 해인사를 쳐 재물을 빼앗고자 했는데, 이제야 실천함이 어떠하냐'는 것이었다. 길동은 웃으며 푸른 도포에 검은 띠를 띠고 나귀 등에 올랐다.
"나는 경성 홍 판서 댁 자제다. 여기서 공부를 하려 하는데, 내일 백미 이십 석을 보낼 터이니, 음식을 장만하라. 너희들과 함께 먹겠다."
이야기를 하니 모든 중들이 기뻐하였다. 길동이 돌아와 이야기한 대로 보내고 나서 부하들에게 자신의 계책을 이야기하더라. 날이 다가와 해인사에 가니 중들이 매우 반겼다. 상을 받고 모래를 슬그머니 입에 넣고 깨물었는데, 그때 소리가 크게 났다. 중들은 놀라 사과를 하는데, 길동은 일부러 화를 냈다.
"너희들이 음식을 이렇게 깨끗하지 않게 했으니 이는 나를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이겠다!"
호령을 하고 모든 중들을 결박하여 앉혔다. 이윽고 수백 명이 달려들어 모든 재물을 챙기니 모두 소리만 지르고 아무 말도 못 하더라. 마침 사람들이 이 꼴을 보고 관아에 알리니 관군들이 쫓았으나 허사였다.
이후 길동은 스스로 호를 활빈당이라고 하면서 팔도를 다니며 수령이 불의로 모은 재물이 있으면 탈취하고,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이가 있으면 구제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정은 홍길동을 잡기 위해 군사까지 동원하는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더라. 길동을 달래려는 마음으로 공문을 각읍에 붙이고 길동이 제 발로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길동의 소원이 병조판서를 한 번 지내면 조선을 떠나겠다는 것이라 하오니 한 번 제 소원을 풀면 제 스스로 은혜에 감사하오리니, 그때를 타 잡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신하들의 말을 옳게 여겨 임금께서 길동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고 사대문에 글을 써 붙였더라. 길동이 이 말을 듣고 사모관대에 서띠를 띠고 수레에 의젓하게 앉아 큰길로 버젓이 들어오니 영락없는 고관이더라. 그가 궐내에 들어가 엄숙히 절하고
"소신이 지은 죄가 큰데, 도리어 은혜를 입어 평생의 한을 풀고 돌아가며 전하와 영원히 작별하오니, 부디 만수무강하소서!"
말하고 몸을 공중에 솟구치니 구름에 싸여 가더라. 그 가는 곳을 누가 알겠는가? 임금께서 보고 감탄하시어
"길동의 재주가 참으로 드문 일이다. 이제 조선을 떠나노라 하였으니, 폐 되는 일이 이제 없을 것이다. 비록 수상하기는 하나, 일단 대장부다운 마음을 가졌으니 염려는 없으리라!"
하시며 팔도에 사면의 글을 내려 길동을 잡는 일을 그만두었더라. 한편, 길동은 다시 돌아와 부하들에게 ‘다녀올 곳이 있으니 조용히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고 하고 즉시 다시 몸을 일으켜 남경으로 향해 가다가 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율도국으로 산천이 깨끗하고 인물이 번성하여 편안하게 살만한 곳이었다. 이리저리 보니 살기에 합당하였다. 마음에 생각하여 ‘내 이미 조선을 떠났으니, 여기에 살며 큰일을 도모해야겠다’ 하였다. 부하들에게 경성 한강에서 기다리라며 임금께 벼 일천 석을 구해 오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길동은 어머니와 수하들을 이끌고 율도국으로 건너갔다. 율도 왕을 토벌하고 백성을 달래어 안심시켰다. 왕위에 오른 뒤 전의 율도 왕을 벼슬에 앉히고, 그 부하들과 장수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신하들은 만세를 불러 환영하였다. 길동이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니 산에는 도적이 없고, 길에서는 떨어진 물건을 주워 가지는 일이 없었다.
이상향, 5분만 더?
영웅의 이야기가 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그림책으로 읽었을 그때에 비하면 길동의 이야기는 사뭇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의 후반부 율도국으로 떠난 그의 이야기가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홍길동은 적자와 서자 차별, 신분제도 등 당시 모순된 현실을 저항하여 ‘율도국’이라는 유토피아를 세운 이야기로 알고 있다. 물론, 작가 허균이 작품에서 자기가 느끼는 부조리함과 그에 대해 본인이 그리는 이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율도국의 묘사는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에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길동의 가슴을 눌렀던 설움,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생겼던 갈등이 해소되고 호부호형을 허락받는다. 임금은 별 큰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길동을 병조판서로 제수한다. 말자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미련도 없이 율도국으로 떠난다.
물론, 그의 능력이라면 굳이 떠나는 일이 없어도 일국의 왕이 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곳을 떠난다. 이는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세계관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사대부들에게 있어 부모나 임금, 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불만을 토로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이 있다. 세상이 나와 맞지 않으면 내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율도국에 대한 묘사를 이해할 수 있다. 그곳은 분명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철저하게 유교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봉건적 사회였다.
제도가 조선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전부 다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홍 판서가 죽은 뒤 조선으로 가서 3년상을 치르는 길동의 모습, 유해를 수습하여 율도국으로 옮기는 길동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사회를 비판하려는 허균 스스로가 유교적 사고와 사대부 의식을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상향이란 결국 ‘내 생각과 사고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세계’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굳이 낙원의 필수조건으로 ‘강이 흐르고 물이 많은 곳’이 제시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형편은 물이 필요했고, 그래서 물이 차고 넘치는 곳이 이상향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사고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그렇다고 해서 길동의 이야기 속에서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만한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상향을 상상하고 꿈꾸는 일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상상만 하고 감이 떨어지길 바라며 나무 아래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듯한 태도다. 감은 언젠가 떨어지겠지만, 이상향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한 번은 그런 학생을 만났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고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을 했다. 꿈이 의사라고 했던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인상적이었거든, 말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굳이 장소가 아니라도 이상에 대해 꿈만 꾸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꿈꾸기만’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는 아편에 취해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아편은 대중을 취하게 하고,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할 것이다. 아픔과 두려움이 없으니 행복하겠지만 결국 이상향은 이상향으로 남는다. ‘이상향이 인민의 아편’이라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하고 푸념을 하신다면 잘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
홍길동전이나 아기장수 우투리 같은 영웅에 열광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것을 입 벌리고 바라보는 일만으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직도 ‘아편’이 불편하다면 다른 말로 표현해볼까? ‘아직도 잠에서 덜 깨서 "5분만 더요" 말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말한다면 정신이 좀 드실까?
어쩌면 ‘홍길동’의 이름이 현대 사회에서 ‘아무개’와 같은 맥락으로 쓰이는 것은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 ‘5분만 더요’ 이야기하며 이루어야 할 이상향을 미루지 마라. 알람을 끄고 일어나라. 누워서는 꿈만 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