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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Aug 31. 2020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당신의 문학에 필요한 것들



1878년 한 남자가 자기 딸과 함께 동굴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동물들의 그림이 가득했다. 구석기 시대 최고의 미술작품이라 불리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알타미라의 누군가 역시 뭔가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림을 그렸으리라. 확실히, 인간의 원초적 본능 중 하나는 ‘표현’이다.


  왜 표현하고 싶어 할까? 만약 홀로 동굴 속에 있다면 굳이 무엇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나의 표현을 보고, 듣고, 느낄 타인의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표현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 글은 작가로부터 태어나 독자에게 의미를 얻는다. 말은 화자로부터 나오지만, 청자에 의해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나의 말과 글이 들리는 것이 되며 읽히는 것이 될 수 있을까?' 지난 글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나의 문학 활동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참 말이 많았다. 모두가 내 말에 집중하는 줄 알았고,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줄 알았다. 어느 날 친구가 "야, 너 근데 사실 노잼임." 말하기 전까진.


 왜 내 말이 지루했을까? ‘아무 말 대잔치’였기 때문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맥락도 주제도 없이 그저 ‘말하기’에 집중했던 내 말은 친구들에게 소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맥락도, 주제도 없는 말이 어떻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나아가 마음을 얻는 일은 논리 없이 불가능하다. 말과 글을 내놓기 전에 적어도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지?’ ‘지금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맥락 상 적절한가?’

 그러나, 맥락과 주제가 뚜렷하다고 해서 내 말과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토론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어느 마을에 양을 치는 소년이 있었다. 그에게 양을 돌보는 일이란 매우 따분한 일이었다. 양을 초원으로 데리고 나가면 그에게는 더 할 일이 없었다. 그저 시간만 죽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소년은 마을로 뛰었다. 익숙한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큰일 났어요! 늑대들이 양들을 물어가요! 도와주세요!" 다급한 외침에 사람들이 나왔다. “늑대라고?” “네! 갑자기 늑대가 나타났어요! 같이 가서 좀 도와주세요! 급해요!”


 그러나, 늑대는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킥킥댔다. 여기에서 그만했어야 했다. 곰들이 나타나 양 뿐만 아니라 자기까지 위험해졌을 때, 소년을 도우러 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문학 활동'을 통하여 쓰고,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섭취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글이나 말만을 읽거나 듣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잘 하는 아이라는 것을 안 뒤 동네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무시했을까? 생각해보라.


 문학 활동이란 곧 그의 삶, 그 사람이다. 아무리 논리 정연한 말과 글을 내놓는다 해도 그가 사회적으로 불신을 받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의 문학이 사람의 관심과 마음을 끌 수 있겠는가?


 역사의 격동기와 함께 타는 목마름과 뜨거운 호소력으로 대중들에게 불을 지핀 많은 목소리들을 아직도 기억하는가. 만약 그들의 가슴에 모두가 기억하는 뜨거운 불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 말들은 그저 허공에 맴돌다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내 가슴을 다 태워 삼키고 그것도 모자라 타인에게 맹렬히 옮겨가는 불! 문학을 하는 이에게는 열정이 필요하다. 흠 없는 필자의 논리 정연한 글일지라도 신념과 열정이 없다면, 타인의 공감을 끌어내기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은 마치 칼과도 같은 도구적 가치이다. 좋은 목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악용될 수도 있다. 대부분 감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학 활동을 하는 주체가 이를 통해 감정을 동요시키는 데만 집중한다면 선동가를 양성할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실제로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요제프 괴벨스가 가진 수사적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최측근 중 하나인 선전장관에 앉혔다. 괴벨스는 독일 국민들을 홀려버린 연설들로도 유명하지만, 그는 연설문만 쓴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문학 활동에는 평생 쓴 일기가 있다.


 그의 일기는 엄청난 양과 더불어 나치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가와 세밀한 성격묘사로 주목받는다. 나치스의 집권과정은 물론이고, 대학살 과정에 대해 암시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앞서 언급한 부분들과 함께 2차세계대전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사료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치 독일을 포함하여 괴벨스와 그의 문학 활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두둔하는 사람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괴벨스는 그의 천재적 재능을 독일 국민들을 전쟁의 광기에 몰아넣는데 사용하지 않았던가?


 악마의 재능을 가졌던 남자의 이 모습을 다시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문학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살펴본 도구들 안에 들어 있는 위험성에 대해 알아두고,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를 맹목적으로 예찬할 생각은 없지만, 아직도 특정 국가에서는 교육의 필수 교양으로 스피치 기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살펴본 방법들 속에는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결과를 만드는 구더기 같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문학 활동을 하는 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깊은 장맛을 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힘도 있다.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사람은 되지 말자. 구더기 때문에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장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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