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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Dec 02. 2020

그러니까, 별의 마음을 갖자.

쓰는 놈인 나에게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글 발행에 앞서 프로필에 ‘작가 소개’를 추가해주세요!’


세 번이었나? 아니 네 번?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나는 합격했으니까. 내 목에 ‘합격 목걸이’는 걸리지 않았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마치 금목걸이를 건 마냥 어깨는 솟아올랐다. 아직 아무도 모르고, 나도 이 세계에 대해 몰랐을 그날 8월 28일이 지나고 기다렸다는 듯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의 첫 번째 브런치 북 ‘영웅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브런치에 도전하면서 기획했던 작품이다. 한편으로는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했지만, 글을 쓰면서 온갖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는 사실은 오로지 나만 안다.


‘차라리 감성 에세이를 쓰지’ ‘이런 글은 조회수도 안 나올 텐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 내면의 소리였다. 한편으로는 대중들이 좋아하는 글들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이건 크고, 저건 작았다. 결국 ‘그래, 뭐 어때. 내 옷은 이거야.’ 생각하고 잘 쓰일 때도, 가닥이 잡히지 않을 때에도 오로지 영웅과 신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길어 올리는 것만 생각했다.

그러던 중 브런치 출판 공모전 소식을 들었고, 원래 기획했던 내용보다 조금 더 많은 분량으로 ‘영웅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썼다. 아니, 낳았다. 펑펑 울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눈물을 쏟아내며 나는 알았다. ‘그래, 이게 내 옷이구나’

첫 브런치 북, 그리고 공모전 응모. 골방에 들어가 맘껏 울었다.


공모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물론, 붙으면 좋겠지. 아니 진짜 좋지. 하지만, 나는 이 자체로 벅차고 충분히 감사했다. 이제야 뭔가를 썼구나. 아니 ‘낳았다’고 해야 했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자식이야’ 말했다.

남들이 보면 ‘자식은커녕 결혼도 안 한 놈이 무슨 미친 소리냐’ 말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자식 낳아본 사람만이 부모 맘을 안다’고 하잖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의 글을 써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내 맘을 모를 거다’

게다가 아주 잦은 일은 아니지만, 신은 나에게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얼굴도 모르는 분들을 통해 전하곤 한다. 지인들에게도 고맙지만, 솔직히 이런 분들의 댓글은 길고 짧은 것에 상관없이 참 눈물이 난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기 전까지는 글이 쉬운 줄 알았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으면 뭔가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글은 그런 게 아니었다. ‘영감’이란 게 정말 있긴 한가보다.

글을 쓰기 위해 ‘나 같은 경우’ 신화나 전설, 그리고 지금은 우화를 읽는다. 읽다 보면 ‘발칙함’에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하지만, 그놈만으론 부족하다. 때가 있다. 모든 재료를 다 모아놓고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안 써지던 글이 ‘촥’ 하고 펼쳐지는 그런 때가 있다.

언제라고 딱 말하기가 어렵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건 ‘글을 써본 사람’만 알 거다. 확실한 것은 ‘이런 나라도 계속 써도 되는 걸까?’ 생각하는 날 슬그머니 댓글과 좋아요로 찾아오는 신의 선물 같은 누군가의 격려가 찾아온다는 거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보면 다른 책들에서처럼 많은 작가들의 추천사가 적혀있다. 그중 김연수 작가가 쓴 추천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그게 소설이든 시든, 어떤 젊은이가 갑자기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면, 지금 그의 내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이것 역시 나에게 찾아온 소중한 댓글에서 본 글귀다. 얼굴도 모르는 풋내기에게 내민 그 글귀를 읽으며 나는 뭔가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타오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든, 내가 지금 내면의 무언가를 태우고 있다면, 그것을 통해 누군가가 잠시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가 가는 길의 실마리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어딘가에서 내 중얼거림을 듣고 있을 신에게 말했다.

뭔가 태우고 있다면, 그래서 나도 조금이나마 열을 발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겐 뜨거움은 아니더라도 자그마한 따뜻함이라도 될 수 있길...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별의 마음을 가지자.



앞으로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내가 쓸 수 있는 것들을 써보려 한다. 내면에선 계속 ‘하지 말라’는 말들이 메아리치겠지. 그래서 나는 굳이 ‘의식적으로’ 또는 ‘일부러’ 이 글을 써서 남겨둔다. 혹시나 ‘또 다른 나’가 있을지 모르니까.

‘뭐하러 써?’ ‘그런 건 소용없어’

말하는 모든 스치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글을 계속 쓰는 까닭은 나와 당신이 ‘별의 마음’을 지녀서 일거다. ‘별이라고 왜 떠 있는 것이 두렵지 않을까?’ 어느 날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가여워 나는 까만 하늘을 쳐다보고 하얗게 울었다.

‘그래, 너도 많이 두렵겠구나’

별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별의 마음은 그런 것일 테다. ‘뭐하러 까만 하늘에 떠 있어?’ ‘누가 봐준다고?’ ‘야, 그렇게 있으면 안 무섭냐?’ 별도 두렵지 않았을까? 오늘 같이 서럽게 바람이 부는 날에는, 요즘 같이 누구 하나 ‘야, 별 보러 가자’ 하는 사람 없는 밤에는 더 그렇겠지.

하지만, 늘 있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고,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을 남기고 가는 분들이 있듯 콧물 잔뜩 마시며 빨개진 볼을 가지고 언덕에 올라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보는 동네 꼬마가 한 명쯤은 있었다. 그러니 별은 그 아이 생각에 오늘도 허공에 떠 있어야 하는 두려움을 이기고 떠오른 것이리라.

그러니까, 별의 마음을 갖자. 글을 쓰는 나는, 그리고 당신은 별의 마음을 갖자. 오늘도 바람이 별에 스칠 테지만, 그 꼬마는. 어쩌면 소년 일지 모르고 소녀일지도 모르는. 이미 어른일지도 모를 그 이는 여전하여서 그 언덕에 빨간 볼을 하고 찾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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