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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Jan 12. 2021

물고기 대신 세월을 낚았다는 건 뭘까

아무 것도 쓰지 못한 날


집에만 있어야 하는 날이다. 사실 집에만 ‘있어도’ 되는 날이다. 굳이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따분해서다. 하품을 하며 화장실에 들어간다. 어렸을 적 샤프에 잔뜩 넣고 썼던 샤프심 같이 까맣고 긴 것들이 입술 위며 볼, 턱에 가득하다. 수염이다. 마스크를 쓴다는 핑계로 면도를 안 했다. “어휴, 이게 뭐야.“ 못 봐주겠다는 듯 방에서 전동 면도기를 챙겨 다시 화장실에 들어간다. 거울을 보며 꼼꼼하게 면도를 한다. 다 됐다. 방으로 들어왔다. 행거에 걸려있는 옅은 회색 셔츠를 꺼내 입는다. ‘이대로 퀼팅 재킷을 입을까‘ 하다가 온도를 확인한다. “그래도 겨울이니까 이대로는 안되겠다.“ 중얼거리며 그 위에 살짝 밝은 네이비 톤의 꽈배기 니트를 입었다. 베이지 색 면바지를 입고 하얀 양말을 다 신고 나서 까만 퀼팅 재킷의 지퍼를 올린다. 마스크도 챙겼다. 신발장을 열어 하얀 운동화를 신는다. 어저께 산 까맣고 얇은 책을 옆구리에 끼운 채로. 도어록을 열고 현관문을 나섰다. 날씨가 -2라는 숫자가 아니라 피부로 느껴진다. 굳이 나온 이유가 있다. 어렸을 적 내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낚시를 가는 거다. 낚싯대는 없지만, 낚시는 할 수 있다. 물고기 말고, 생각을 낚으러 가는 거다. 어렸을 적 나는 가끔 저수지로 낚시를 가시는 아버지를 쫄래쫄래 따라나선 적이 몇 번 있다. 사실 물고기에 관심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아버지가 사주시는 노란 단지 바나나 우유가 달콤했다. “00아, 너도 한번 해볼래?“ 아버지는 구부정한 낚싯바늘에 아직 꿈틀대는 지렁이를 꿰며 말씀하셨다. 작고 하얀 내 손 위에 힘줄 붉어진 아버지의 거친 손이 포개어진다. 낚시 바늘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다가 저수지 물속으로 ‘퐁’ 하고 들어갔다. “와, 잡았어요!“ 소리를 치며 즐거워하던 때도 있었지만, “에이, 뭐야. 오늘은 아무것도 못 낚았네.“ 입술이 툭 튀어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때도 있었다. 잔뜩 삐친 나에게 아버지는 파란색 포장지에 싸인 달콤한 초코바를 건네시며 “아들, 낚시란 건 말이다. 세월을 낚는 거야.“ 하셨다.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직 그 말의 의미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나도 뭔가를 낚으러 나섰다. 낚싯대는 없지만, 괜찮다. 내가 낚으려는 건 파닥거리는 물고기가 아니라 그만큼 살아서 펄떡거리는 생각들이니까. 회색 굴다리를 지나 내리막길을 천천히 걷는다. 눈이 내렸다가 녹아서인지 아스팔트 길은 온통 진흙 투성이다. 조심스럽게 걷지만, 이미 하얀 운동화 위에 진흙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러면 딴 건 몰라도 걷고 들어온 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날 거다. 가져온 책을 펴고 천천히 글을 읽는다. 무언가를 생각해 냈다. ‘음, 그러니까 이건...‘ 생각하는 바로 그때 어렸을 적 한정식 집에 처음 갔을 때 들었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댕, 댕!‘ 정갈하게 음식이 담긴 누르스름한 놋그릇이 수저와 부딪히면 나는 그런 소리였다. ‘뭐지?‘ 잠시 책에 드리운 낚싯대를 치우고 주변을 살펴보니 길가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갈색 지붕 옆 까맣게 가려놓은 밭 같은 것이 보인다. “인삼 밭인가?” 시선을 사로잡은 거기를 잠깐 쳐다보는데, 다시 ‘댕, 댕!‘ 소리가 울린다. 지붕 끝 처마에 달린 종 같은 것이 살며시 보인다. 그 옆으로 ‘@@농원’이라는 빛바랜 간판이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을 보니 농사를 짓는 누군가가 계신 모양이다. 조금 더 길을 걸어 내려가니 이번에는 맑은 소리가 아니라 ‘위이이이잉’ 하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들이 난다. 하늘에 잔뜩 깔려있는 회색 구름의 색을 닮았다.


 ‘00 정밀’이라고 쓰여있는 그 공장에는 불이 잔뜩 켜져 있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걸어가 지나친 파란 철문 너머 베이지색 공장이 어둑어둑하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것과는 정 반대였다. 저 멀리 엄청나게 큰 철탑이 보인다. ‘저런 건 대체 어떻게 운반하는 걸까?‘ 잠시 생각하며 내리막길을 돌아 내려가는데 ‘멍멍!‘ 아득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쌓인 눈 사이로 듬성듬성 파란 지붕이 보인다. 가까워진 만큼 분명해진 개 짖는 소리 뒤로 아련하게 퍼지는 게으른 소울음이 들린다. 소똥 냄새가 나지 않아서 몰랐는데, 여기는 소를 기르나 보다. 조금 더 내려가자 이번에는 파란 컨테이너 박스가 오른쪽에 보이는 내리막길이 보인다. 얼음이 살짝 끼어 있는 듯 보여서 발끝에 신경을 쓰며 천천히 내려간다.


 저 앞에 까만 물로 젖은 회색 굴다리가 울고 있다. 축축한 내 발걸음이 거기에 더해지자 소리가 조금 더 을씨년스러워지는 듯했다. 굴다리가 우는 듯한 그 소리는 당연하게도 굴다리가 울어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굴다리를 나오자 멀리 산이 보인다. 하얗게 눈이 쌓인 산 사이로 까만 도로가 보인다.


 바람소리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내며 달리는 차들이 있다. 굴다리를 지나며 들었던 소리는 사실 그것이 울며 내는 소리가 아니라 차가 지나며 내는 소리였던 거다. 조금 더 걸어 나오자 양 옆에 비닐하우스가 있는 긴 오르막길이 보인다. 비닐하우스 옆에는 쫀득쫀득한 마시멜로를 닮은 하얗고 큰 무언가가 게으르게 누워있다.


 노랗게 칠한 페인트가 조금씩 벗겨져 있는 그 주유소를 지나 조금 더 걸으며 책을 읽으려는데, 뭔가 내려온다. ‘아, 이제야 생각들이 내려오는데!‘ 생각했지만, 더 읽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거다. ‘여기까지만 걷고 돌아가야겠다’ 생각했다. 어차피 눈이 오면 책을 더 펼칠 수 없으니 말이다. 사실 뭐 하나 건진 건 없다. 오늘 기껏 걸어서 낚은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돌아오는 길은 더 헤매기까지 했다.


 아무렴 괜찮다. 생각했던 글이 나오지 않았지만 괜찮다. 어쨌든 오늘도 썼으니까. 그거면 됐다. 이따 아버지께 한번 여쭤볼까? ‘물고기 대신 세월을 낚은 날’이 이런 거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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