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인간 Jan 13. 2021

택배야, 고마워 거기 있어줘서.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형, 나 다음 주에 고향으로 내려가." 학부 후배에게 카톡이 왔다. 서울에서 일을 하며 사는데, 다음 주면 이사를 간다고.



 "아, 그래? 그럼 형이 갈게. 서울 있을 때 만나야지. 밥 먹자." 신촌역에서 만났다. 다른 후배에게 소개받은 돈가스집이 근처다.



 한참 맛있게 먹는데, 문자가 왔다. '고객님의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얼마 전 선물 받은 비타민이다. 문자를 확인하고 ‘이따 집 가면 확인해야지’ 생각했다.



 식사를 마쳤다. 근처 책방에 들렀다. 읽고 싶은 책들이 눈에 보였다. "형, 필요하면 내가 사줄게." 망설임 없이 ‘고맙다’고 했다. 카페에 들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했다.  



 "형, 근데 기차 시간 언제야? 괜찮아?" 커피를 홀짝대며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제야 기차 예약을 안 해놓은 게 생각이 났다.



 기차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무래도 좀 빠듯하다. "기차 예매를 미리 안 해놨어. 근처 가는 기차 중에서 아무나 빠른 거 타지 뭐."



 지하철을 탔다. 1호선으로 환승한다. 시계를 보니 '내리자마자 뛰면 가능하겠다' 생각이 든다. 기차표를 예매했다. 내려야 할 역이다. 안전문이 열린다. 앞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했다. 개찰구까지 뛴다. '오케이, 성공!'



 '**아, 고마워. 덕분에 즐거웠다. 나 지금 집까지 가는 기차 탔어.' 카톡을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후배가 사준 책을 읽다가 깜빡 졸았다. 몇 번 고개를 흔들고 나니 다음 역이 내려야 할 역이다.



  기차에서 내렸다. 재킷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하니 카톡이 왔다. '뭘, 내가 고맙지. 점심 잘 먹었어. 또 만나 형.'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씩 웃으며 역사를 나온다.



 '집 가면 택배 확인하고, 사진 찍어서 감사하다고 문자 드려야지' 택배를 받는 설렘이었을까? 신나게 집으로 향한다. 뒤에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씨,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근데, 혹시 택배 시킨 거 있어?" 같은 동네 아주머니다. '혹시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나' 생각하면서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곤 인사를 한다.



 "네, 아주머니. 저는 뭐 잘 지냈죠. 방금 약속이 있어서 서울 다녀오는 길이에요. 아주머니도 잘 지내셨죠? 아, 택배요. 네, 하나 시키긴 했는데요."



 ‘이 아줌마가 개인사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으시네’ 생각하며 불쾌감을 표출하려는 순간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게 둘이 대화하는 게 근 5년 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최대한 불쾌한 걸 티 내지 않고 상냥하게 말해야지’ 생각하는데, 아이고! 우리 집으로 와야 할 택배가 그쪽으로 갔단다.



 '이상하다, 분명히 주소를 잘 입력했을 텐데' 진짜다. 그럴 리 없었다. 카톡으로 받은 그 선물은 내가 이전에 입력해놓은 주소 그대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 카톡으로 배송 받은 택배가 잘 왔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 주소를 바꾸지 않고서야...



 택배를 전해주겠다며 따라오라신다. 아주머니의 발걸음에 맞춰 길을 걸으며 정말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눈다. 어색한 나와는 달리 아주머니는 원래 이렇게 달변가셨나 할 정도로 능숙하게 어제 만난 사람처럼 대화를 이어 가신다.



 대화를 하며 펼쳐진 풍경은 이야기하는 분위기보다 더 낯설었다. 동네에 들어서서 쭉 직진을 한 뒤에 갈림길이 하나 나온다. 우리 집은 왼쪽에, 아주머니 댁은 오른쪽으로 가야 나온다. 통 가보지 않은 길이다.



 커다란 황소의 게으른 울음소리가 들린다. 네모반듯 하게 빨간 벽돌로 쌓아 올린 집과 돌담들이 보인다. 같은 동네인데, 풍경만 찍어서 보면 다른 곳 같다.




 "여기야.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갖다줄게." 조신하게 손을 모으고 기다린다.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머니 손에 들어가실 땐 없던 베이지색 상자가 들려있다.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한 번 더 확인할게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감사함을 담아 꾸벅 인사를 한다. 우리 집 방향으로 다시 걸어 나온다. 택배 스티커를 보니 ‘00길 **‘ 우리 집 주소 맞는데?



 택배 아저씨가 잘못 배송하신 거다. 일부러 뭐라고 하진 않을 거다.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 '택배 아저씨, 감사합니다' 오히려 공손히 인사를 해야 한다. '택배야, 거기 있어 줘서 고맙다' 인사를 해야 할 판이다.



 먼 곳에 있는 후배도 만나러 일부러 갔는데, 정작 한 동네 아주머니와는 몇 년 동안 채 5분도 이야기를 못 나눴다. 택배가 거기 가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그랬을 거다.



 오배송이 고맙다. 택배 아저씨께 꼭 인사해야지. 덕분에 아주머니랑 대화를 많이 했으니까. 아, 아저씨에게 그냥 '고맙습니다'라고만 할 거다.



 또 아주머니를 뵈면 좋겠다. 그때 감사했다고 꼭 말씀 드려야지. 택배에게도 한 번 더 말해본다. '택배야, 고마웠다. 그때 거기 있어 줘서.'

매거진의 이전글 물고기 대신 세월을 낚았다는 건 뭘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