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인간 Jan 23. 2021

믿지 않는다. 믿는다.

선, 그리고 악.




 악을 믿지 않는다.

   어렸을 적 보았던 텔레비전 속 이마에 뻗친 뿔, 엉덩이에 툭 튀어나온 꼬리. 나는 악을 믿지 않는다.

   나는 악을 믿지 않는다. 박쥐 날개, 삐죽 나온 이빨, 나는 악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악을 믿는다. ‘남들 다 하는데 뭐 어때’ ‘시켜서 했어요’ 너무나도 쉽게 말하는, 나는 악을 믿는다.

   나는 악을 믿는다. ‘나’를 종교로 삼고 자신의 것에는 한 없이 사랑을 쏟지만, 자기 외의 것들 모두는 도구로 삼는. 나는 그런 악을 믿는다.

   나는 악을 믿는다. 대로변에 심기운 가로수들처럼 악은 얼마나 평범한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시켜서 했어요’ ‘남들 다 하는데 나라고 뭐 어떻습니까’ 하면 된다.

  나는 악을 믿는다. 전자레인지에 3분 돌리면 따끈하게 나오는 죽처럼 악은 얼마나 간편한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옆에 누가 있던, 뭐가 필요하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무던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있으면 된다.

  선을 믿지 않는다.

  교회당 유리창에 알록달록 그려진. 황금 나팔, 순결한 날개. 나는 선을 믿지 않는다.

  나는 선을 믿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려와 악을 벌하고 의인을 구원하는, 나는 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선을 믿는다. ‘그냥 보여서 했어요’ ‘저 사람에게 그냥 이게 필요한 것 같아서요’ 너무나 어렵게 발걸음을 떼는. 나는 선을 믿는다.

  나는 선을 믿는다. 내 시간, 힘, 감정까지 쏟아부어 나를 도구로 삼아 누군가를 비춰주는. 나는 선을 믿는다.

  나는 선을 믿는다. 흐르는 공기처럼 선은 얼마나 가득한지.

  그냥 한 마디 하면 된다. 출퇴근 날 대신해서 운전하는 버스 기사님께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몇 마디로 선은 작동한다.

  나는 선을 믿는다. 하늘을 쳐다보면 수없이 떠 있는 별처럼 선은 얼마나 널렸는지.

  선은 평범한 손에서 피어오른다. 주머니 속 300원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나오게 하듯, 선은 아주 보잘것없는데서 작동한다.

  나는 악을 믿는다. 그리고 나를 이런 악으로부터 끌어내시기를 기도한다.

  나는 선을 믿는다. 그리고 내가 이런 선을 작동시킬 도구로 삼기 위해 의식을 켜 둔다.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