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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처음이니까.

인생에 2트가 어딨어

by 쓰는 인간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부장님이다. 다른 사람들도 몇 명 같이 들어온다. 그런데, 부장님 손에 못 보던 것이 들려있다


‘설마 내껀가?’



설렘은 아니었다. 꽂혀 있는 초가 몇 개인지 빠르게 세어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케이크는 내 자리를 향해 다가온다. 나머지 인원이 박수를 친다. 어쩐지 다 센 초의 수는 오늘부로 내 나이가 된 숫자와 똑같다. 노래를 부른다. 폭죽이 터진다. ‘아, 나 오늘 생일?’


가끔 생각한다. ‘벌써 내가 -살이라고?’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나와 생일이 같은 그 친구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우리는 생일이 되면 친구들을 서로의 집으로 데려갔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성숙했다면, 경쟁 대신 함께 축하를 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것이 있다. 물론, 가끔 생각나긴 하지만,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흡입하듯 먹었던 초코케이크를 지금은 그때처럼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며칠 면도를 하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그런데 왜일까? 내 속에 있는 나는 ‘수염은 커녕 여전히 초코케이크를 좋아하는 아이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가계에만 동기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과 로고가 찍혀있는 그 전자기기들에만 ‘동기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도 동기화가 필요하다. 사회는 우리가 각자가 맡은 역할이나, 나이에 따라 어떤 행동을 마땅히 해야한다고, 특정한 가치를 가지라고 말한다.



물론, ‘닉 값’이나 ‘나이 값’ 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다만, 우리에게는 값을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에게도 동기화는 필요하다. 누구나 이번 생은 처음이고, 이 나이가 나에겐 n회차가 아니니까.


장차 체스마스터가 될 8살 꼬마는 모두에게 패배했다.


우리나라에 이세돌이 있다면, 미국에는 사무엘 레셰프스키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스 신동으로 불렸다. 체스를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1920년 프랑스 파리에서 당시 불과 8살에 불과했던 사무엘은 10명의 체스 마스터들을 ‘동시에’ 상대했다. 결과는 어땠냐고? 나는 지금 신화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장차 뛰어난 체스 마스터가 되는 이 어린아이는 10명 모두에게 패배했다. 그 역시 n회차 인생은 아니었기에 8세의 나이에 10명의 체스 마스터들에게 승리를 따내는 일이 불가능했음은 당연한 일이었겠다.


인생은 ‘육성게임’이 아니다.



누구는 ‘3트가 국룰’이라고 하지만, 인생에 ‘2트‘가 있다면 어떨까? 더 나은 결론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육성게임이 아니다.


결론이 소위 ‘해피엔딩’이라고 해서 그것이 ‘좋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무언가를 남기지 못했다고 해서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그 짐승보다 열등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인생은 ‘결론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쉽게도, 인생은 1트 뿐이다. 피안의 세계에 대해 말하지는 않겠다. 거기까지 생각하며 살기엔 너무 짧은 1트의 시간이니까. 얼마나 지났건 우리는 모두 n회차가 아니라 1회차의 인생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5트를 거친 누군가의 공략이 아니라, 함께 1트 중인 사람의 공감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공략’이 아니라 ‘공감’이 필요한 것 아닐까?

답을 내려주지 못하는 선배는 멍청한 어른일까? 그렇다면, 나는 지혜로운 어른이 되기를 포기하겠다. 다 아는 것으로 보여도, 잘난 것 같이 보여도 사실 그렇지 않다. 인생 3회차 같은 노련미가 넘치는 그 선배도 1트를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니 괜찮다. 답을 주지 않아도, 이 길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술술 풀어 넘기지 못해도 괜찮다. 2트는 없고, 우리는 1트 중이다. 하루하루가 새롭다. 그러니 괜찮다. 다 괜찮다. 이번 생이 처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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