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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몬트 Nov 18. 2024

미워하는 마음 없이, 다 지나가리라

이국에서의 두 번째 격리생활을 맞으며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에는 쓰는 것과 멀리 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어제는 일기장을 펼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쩌다 알고리즘의 안내에 따라 다다른 어떤 블로거의 캐나다 여행기에서 설원 사진을 보는 것이 코로나 격리생활 3일 차까지의 유일한 낙인데, 이곳의 날씨도 확 추워져 바깥은 꼭 설원이나 다름없으니 비슷하다며 속으로 위로를 해야 할까. 나의 격리로 며칠간 보지 못한 C가 내 방에 나 있는 큰 창가로 눈을 던질 요량으로 살금살금 다가오던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순간에서 시린 눈을 처음 느낀다. 집이 1층에 있기에 가능한 순간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미워하는 마음이 든다. 몸이 약해지니 정신도 따라 허약해진 까닭이다. 챙김을 더 받고 싶어 보채는 아이 같다. 언젠가 C가 배가 아프다며 밥을 먹다 말고 누워 버리는데, 먹고 나서 바로 누우면 좋지 않다고 옆소리에서 잔소리를 해가며 그의 배를 아주 미약하게 쓰다듬다가 어린 시절의 어떤 장면이 기억났다. 어렸을 때에 잔병치레가 많고 특히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배가 자주 아팠던 나는 끙끙거리며 침대에 누워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본능적으로 엄마, 엄마 하며 불렀고 언제나 그때 당시 내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는 나의 올챙이 같던 배에다 큰 손을 갖다 대고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엄마 손은 약손, 솔 배는 똥배, 라는 음률을 입힌 주문과도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셨다. 주로 엄마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에 내 증상이 나타나기 일쑤였기 때문에 하루를 끝내기 전의 피곤으로 가라앉은 엄마의 목소리가 어린 시절 나에게는 엄마가 옆에 있다는 이유로 안전함을 느꼈던 건지, 아니면 문지르는 손이 규칙적으로 배에 닿는 감각과 노랫소리가 안정감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마법처럼 아픈 배의 감각은 사라지고 솔솔 잠이 들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알게 모르게 몸에 새겨졌는지 여전히 지금까지도 호되게 앓을 때면 이제는 그때와 같이 소리를 내어 찾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꼭 되뇌며 차가운 배 위에 닿을 감각을 기다리는 것이다. 엄마, 엄마, 하며.



이전의 오래된 집에 살 때 주방에는 난방을 꺼두어 겨울 중에서도 유독 낮아진 기온이 이어지면 밤새 오일이나 기름류가 얼어붙곤 했다. 그래서 요리 때마다 뜨거운 물에 담가 녹여주어야만 했다. 격리 중인 방에서 기댈 곳은 인터넷뿐인데, 마침 랜선이 말썽이라 이미 달구어져 있는 공유기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문득 오일을 녹이던 순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고립이 오래되면, 의식의 흐름이 잠재기억의 모든 곳에 뻗힌다.


어제는 미뤄두었던 이탈리아 여행기를 블로그에 정리했다. 첫 번째 코로나에 걸렸던 지난 격리 시기에는 포르투갈에서 찍은 영상을 편집하며 지루한 시간 중 일부를 보냈는데 이번도 비슷하다. 정신이 건강해야 몸의 회복도 빨라진다는 핑계 삼아 책과 영화도 가까이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무척 짧아 허무하게도 금방 읽어버렸다. 김초엽 작가의 책을 e북으로 대출하였고 이 또한 소설이라 금방 읽지 않을까 싶다. <길모어 걸스> 시즌 1을 끝내고 시즌 2를 시작하고 있다.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며칠을 끊어 보던 <The Good Nurse>, 그리고 <에놀라 홈즈 2>와 <더 원더>, 그리고 일부 일본 영화 특유의 불쾌함이 느껴져 마지막엔 1.25배속을 해야 했던 <헬터 스켈터>까지 다 봐버렸다. 이쯤 되면 격리의 목적이 바뀐 듯싶다. 그래도 오늘 저녁엔 뭘 보지, 두근거리며 목록을 찾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다. 학기 중에 이러고 있으니 빠지는 수업 시간들에 초조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오전에는 나보다 이전에 코로나 판정을 받았던 W의 격리까지 마치고 어쩌면 함께 할 여행을 작정하는 통화도 마치고, 종종 이상한 사람과 이상하게 얽힌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H와 오래간만에 긴 통화를 나눈다. 격리라 직접 사람을 마주하면 안 되니, 이렇게 통화로라도 이 세상에 고립되어 있는 느낌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오히려 코로나 양성 결과가 나오기 전이 감기증상처럼 더 아팠고 지금은 딱히 걱정할 것 없는 나의 상태에도 걱정 어린 얼굴로 마주하시는 부모님과도 영상 통화를 마치고, 오후 햇살이 눈부셔 마스크를 끼고 일부러 통행이 적은 길로 종종걸음으로 산책을 하다가 마인 강가까지 가버렸다. 눈 쌓인 거리에 아직 찬 바람이 남아 있는데도 꽤나 오래 걸었으니 몸이 다시 골골거리며 침대에 누워 숨을 고르고 있는데 C로부터 영상 통화가 와 정신없는 카메라 무빙을 선사한다. 얼굴을 카메라에 가까이 대니 짐짓 강아지처럼 마치 바로 앞에 있는 듯 혀로 얼굴을 쓸듯 날름거리는 모습에 웃다가 통화를 끝내니 바깥은 이미 어둠이 자욱하다. 한국인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마켓에 같이 가자 한 약속을 나는 격리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는데 둘이서 다녀와 찍어 보낸 사진에 담긴 어여쁜 마음과 예쁜 얼굴을 보자마자 급격히 마음이 회복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들을 하루의 끝에 집에서 다시 재회하는 가장이 된 마냥 마음이 몽글거린다. (이 일기를 옮겨 적고 있는 지금, 두 친구에게 그때 들었던 내 마음을 고백해야겠다! 아직도 그때 보내준 둘의 사진을 보면 당시의 몽글해진 순간이 생각난다고.) 그래도 어제의 나, 사랑을 꽤 받았네! 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던 건지 이제는 아리송하다.


오늘 아침 우연히 알고리즘으로 보게 된 김영하 작가의 말이 이상하게도 불특정 다수에게 미워하던 마음과 연결된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그리하여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인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거나 내가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그 순간의 내가 약하고 만만한 사람이라 그런 상황에 놓이는 것이며 동일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그러지 않는 것이 반증이라며 덧붙이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미움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에게 향해 있다. 일기에서조차 나는 그 이름을 적지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인 거고, 그 사람이 싫다고 여기는 나의 모습은 또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리하여 나 또한 그를 미워하는 마음 역시 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은 구체화하고 특정하지만, 싫어하는 것과 사람을 특정함으로써 이 미운 마음을 단단하게 하여 미워하는 마음을 영원히 가지지는 않도록 하는, 나의 최종의 희망 같은 것이다.


어제의 하루처럼, 오늘도 설원을 밟을 기회가 잠깐이라도 있을까. 지루한 이 하루, 하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이 하루가 그저 무탈히 지나가기를.


지금 저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다 지나가리라. 지금까지 아비규환처럼 살아온 소위 '인간' 세계에서 진리라고 느낀 것은 단 하나 그것뿐이었습니다. 다 지나가리라.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45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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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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