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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몬트 Sep 02. 2024

행성 하나, 찰나의 순간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기를 써야지, 생각만 하다 이제야 제대로 일기장을 편다. 오늘은 원래 Bad Kissingen을 가려다 교수님들께 메일을 쓰면서 기차 시간을 자꾸 놓쳐 간단히 기차로 20분여 걸리는 Ochsenfurt를 다녀왔다가 쨍한 햇볕에 한껏 지쳐 돌아와 강가 근처의 한 노상에서 맥주를 냅다 들이붓고 있다. 시원한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가니 한결 더위가 가신다.



하루하루 놓치기 싫은 순간들이 하나 이상씩은 꼭 있었을 텐데도 귀찮음이 늘 이겨 그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나를 행복의 상태에 절이게 해주는 순간이 분명 다시 올 것이라 자신하기에 크게 슬퍼하지는 않기로 한다.


5월의 중반이 다 되어간다. 어김없이 여러 사람들과 소통의 지난함을 느꼈지만 반대로 날이 좋아지다 못해 이제는 여름이 꼼짝없이 와버린 것 같은 풍경을 처음 본 이처럼 신비로이 맞이하고 있다. 친밀히 지냈던 이들이 다가오는 8월이나 9월에 대거 떠날 예정에 있어 조금 울적한 것을 빼면, 세미나를 마치고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는 요즘이다. 어제는 X가 멋진 카메라로 단과대 건물 앞에서 졸업증서를 든 나의 모습을 담아주었는데, 사진을 공유했더니 넘치게 많은 축하를 받았다. 한국에 계신 교수님들께도 메일을 쓰면서 감사함으로 마음이 뭉근해지는 것이, 역시 나는 사람 복이 많다는 걸 느낀다.


두 번째 석사를 졸업한 것이라, 한국에서의 석사 입학부터 졸업까지의 시기를 오랜만에 구글포토를 통해 들추어보는데 인연의 소중함을 이렇게 체감하기도 한다. 최근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에 대한 김범준 교수님의 리뷰 영상을 보며 우주의 역사로 치면 찰나에 머무르는 우리가 그 찰나의 시간 속 관계를 맺고 인연을 쌓는 것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우연에 가까우며 동시에 그래서 이 순간이 아주 중요하다는 말씀이 연상된다. 이 찰나의 순간에 같은 시기를 사는 것만으로 엄청난 우연인데, 그런 시기 속 서로를 스쳐가게만 두지 않고 연속성 안에서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이 인연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겠지만 서로의 울타리 속에 잇었던 그 순간들은 내 삶의 영원한 궤적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니 나의 주변에서 나를 아껴주고 북돋아 준 이들로 이뤄진 나의 생이 특별해진다. 이렇게 생각하면 울적함이 조금은 덜어질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들도 기척 없이 다가올 것이며, 지난 인연들과 다시 만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작년 여름에 '다시 꼭 이곳으로 돌아올 거예요'라며 단언했던 W가 독일로 되돌아온다. 다시 시작될 박사과정이 너무 막연해 불안하기보다 새로운 시작의 설렘이 더 큰 지금은, 이러한 소소한 기쁨 - 하지만 나라와 나라를 오가는 것은 따져보면 절대 소소하지는 않다 - 에 큰 감정이 더해진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챙겨야지. 실은 신청할 수 있었던 장학금인데 놓친 것들도 있다. 이런 일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챙겨야 하는 건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모처럼 찾아온 여유에도 최소한의 의무는 다 할 것. 그러고 나서 여유를 즐길 것. 다음 학기의 시작까지 항해하는 나의 노에 적힌 글이지 않을까.


앤 드루안에게 바친다.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 속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의 커다란 기쁨이었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서문


Pale Blue Dot, NASA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969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7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지는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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