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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몬트 Sep 23. 2024

이탈리아 여행기 - 2

2022.9.7. 몬짜와 밀라노


늦지도 그렇다고 아주 이르지도 않은 시간에 잠에서 깨었다. 다세대주택 형식의 숙소는 2층에 있는데도 아침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분주한 소리가 가까이 들려 의아했는데, 어제 어두운 시간에 도착하는 바람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숙소의 구조를 해가 뜬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체크아웃까지 시간이 좀 남아 숙소에서 몬짜Monza 시내까지 5km 가량을 걸으며 이곳 저곳을 사진으로 담았다. 역시나 눈에 담기는 건물과 사람의 형상은 독일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어 큰 반향은 들지 않지만 흐린 거리를 짐 하나 없이 걷는 것도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고 믿으며 걷고, 또 걸었다. 


몬짜의 이모저모


하루 일찍 들어오는 일정의 비행기삯이 더 값싸지 않았더라면 아마 몬짜라는 곳은 방문하지도, 평생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내를 돌며 평일 이른 아침인데도 거리에는 바쁘게 혹은 느릿하게 걷는 사람들로 구석 구석 채워져 있었고 활기가 없는 곳이 없었다. 나와 전혀 상관 없는 것들이 이렇게 하루 아침에 그 광경에 잠시나마 물드는 경험이 새삼 신기하다. 오전의 짧은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무거운 짐을 애써 들어올린다. 곧 입국할 친구들과 마주하기 위해서 밀라노Milano로 가야 한다. 비록 참견쟁이 아저씨로 인해 표를 잘못 끊어 창구의 역무원과 다소의 실랑이를 벌여야 했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회색빛의 밀라노


물론 밀라노로 가는 기차도 어제의 베르가모에서 몬짜로 오던 여정처럼 당연스럽게 연착이 되었고, 이전의 역들과 달리 웅장한 밀라노 역에 출구에 나서 숙소로 가는 길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어깨를 한껏 짓누르는 짐에 20분을 걷는데도 쉽게 기억이 암전된다. 꿉꿉하고 흐린 날씨 탓에 스쳐가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길 겨를도 없었다. 짐만 맡기고 친구가 올 때까지 본래는 프라다 공장Fondazione Prada Milano을 다녀올 셈이었는데 사이트에 적힌 안내와는 달리 짐을 맡겨주지는 않고 내가 직접 체크인을 해서 그 방에 짐을 나두어야 하며 열쇠 또한 사전에 공동 예매자로 기입한 동행자가 온다 하더라도 내가 체크인을 한 이상 열쇠는 주인이 다시 맡아주지는 않고 내가 친구들이 올 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말에 꼼짝없이 장시간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친구가 올 동안 근처에 20분 가량을 걸어 찜해둔 카페에 가 카페인 충전을 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하지만 친구가 타고 온 비행기에서 부친 짐이 도착하지 않는 갑작스러운 불상사가 생기는 바람에 친구가 숙소로 오는 시간도 무기한 딜레이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어디론가 다녀와도 충분할 시간이었으나 이탈리아에서의 일정은 대부분 이렇게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책의 굴레 속으로 다시..


두 거리를 양 옆에 둔 큰 숲길의 어느 모퉁이에 조그맣게 나있는 카페는, 한국이었다면 평범히 볼 수 있는 분위기의 카페였을 텐데 유럽에서는 이런 것이 귀하니 찾는 사람들로 이미 만석이었다. 마침 바깥 좌석이 금새 자리가 나 잠시 찾아온 볕을 담뿍 받으며 책을 마저 읽는다. 친구들이 오면 금새 이렇게 가라앉는 시간도 없을테니 기꺼이 가라앉는다. 주드의 아픈 마음과 몸이, 그 고통이 읽는 동안 눈을 통해 전이된다. 이 소설의 의미는, 모든 사람은 크고 작든 저마다의 고통과 상처가 있기 마련인데 소설 속 인물들이 해일같은 큰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에 걸쳐 겪는 고통들이 처절히 묘사되어 있어 읽는 독자마다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고통의 규모에 상관없이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우울하다. 멈추고 싶은 구절이 꽤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만 읽고 싶지는 않았다.


마트의 이모저모


그렇게 시간을 한참 보내도 친구의 부친 짐이 나올 생각을 않자 친구는 그 곳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했고 나 역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근처의 식당에 와 피자 한 판을 주문했다. 맥주도 함께 주문하며 당연히 다 먹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맛이 너무 좋아 먹는데도 식욕을 더 돋운 까닭에 다 해치운 채 약간 불편하게 배부른 풍족함으로 가게를 나선다. 근래 식욕이 없어 그렇게도 살 수가 있냐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나의 식욕의 문제라기 보다는 식욕을 돋울 만한 음식의 유무였나 보다. 이탈리아에선 굳이 맛집이 아닌 어느 곳이건 우연히 들어가도 기본적인 맛은 보장될 만큼 훌륭한 미식의 도시라는 말을 절감한다. 친구는 자신의 짐이 결국 오늘 안으로 오지 못해 숙소로 받기로 했다며 이제서야 공항을 벗어나고 있다는 연락을 주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마트에 들러 구경도 잠시 한다. 현지인들이 무엇을 먹는가를 탐구하는 것도 재미가 있다. 방으로 돌아와 전자기기들을 충전시켜 두고는 나 역시도 편한 자세로 친구를 기다리며 다시금 책을 읽어내려갔다. 



나의 여정도 잦은 연착과 기약 없는 대기로 지쳐 있다 여겼는데 간소한 짐만을 가지고 온 친구의 오랜만인 얼굴 역시 비할 데 없이 지쳐 있어 밀라노 길거리의 한복판에서 그만 서로의 얼굴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캐리어 하나가 없으니 (이 친구는 다른 친구와 내가 짧은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서도 더 남아 이탈리아 남부까지 갔다가 독일 뮌헨에 다시 만나 긴 휴가를 마칠 예정이었으니 자연히 짐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큰 캐리어 하나를 부친 것이었다) 당장 입을 옷을 구하기 위해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의 어긋난 예측으로 아직은 환한 거리에 발을 내딛는다. 우리와의 여정 내내 단벌신사가 되어주었던 노란 슬립 원피스를 사고는 마침 근처에 점심으로 먹었던 식당이 바로 근처에 있어 발이 고되었던 우리는 고민 없이 다시 향했다. 배가 아직 부른 탓에 나는 디저트와 와인만을 먹는데 알딸딸한 기운으로 밤이 젖어든 밀라노의 거리를 걸으니 자연스레 기분이 들뜬다.



10시 반으로 예약해둔 재즈바에 가는 것이 나로서는 두 번째 날, 친구들에게는 이탈리아 여정에서 첫 번째 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그 곳에 먼저 도착한 우리는 맥주 한 잔을 시키고서 두 곡 쯤 지날 때였나 영국에서 온 친구가 가벼운 여행객의 차림으로 들어와 공연 중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그녀를 맞이한다. 모던하고 실험적인 음악들이 이어지더니, 중간에 정통재즈 느낌이 나던 곡은 눈을 감고 들으니 마치 구슬같던 피아노 소리와 먹먹한 보컬의 합이 천상 같았다. 스물 한 살, 스무살에 처음 만난 우리에게는 숙소로 돌아가는 밤의 길이 꼭 처음 만나 근 4년 가량을 헤집고 다니던 시절로 돌아간 듯 대학 교정의 거리 같다. 숙소로 돌아와 차례로 하루의 묵은 먼지를 씻어내고 말 그대로 수마에 깊이 빠져들었다. 일기를 쓰다가 잉크가 부족해졌지만 갈아 끼우려 움직이기엔 숙소의 오래된 원목 바닥이 내는 소음이 곤히 잠든 친구들을 공연히 깨울까봐 미결로 남겨둔 채 조명을 지우고 나 역시 잠에 들었던, 두 번째 날이 이렇듯 저문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355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28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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