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와 꼬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9시 15분으로 예약해 두었고 (이 예약의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며칠 전에 알게 되어 그때부터 일행 중 가장 한가한 내가 틈날 때마다 사이트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자리를 얻게 되었다. 역시 백수가 승자일지니) 표의 수령을 위해서는 적어도 30분 전에는 도착하라는 공지를 받은 터라 이른 시간부터 깨어 준비를 마쳐야 했다. 셋이서 온전히 함께 일정을 시작하는 첫날의 하루가 밝은 셈이다. 걸어서는 무리가 있기에 처음으로 메트로도 타본다. 발권이 그리 오래지도 않게 끝나고 입장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바로 앞 카페에서 물을 한 병씩 사 목을 축인다. <최후의 만찬>은 색이 옅어질 것을 대비해서인지 꽤나 어두운 실내의 높은 벽으로만 볼 수 있었는데, 그림 자체보다는 복원의 과정을 서술한 역사가 내겐 더 흥미로웠다. 최후의 만찬의 그늘에 관광객들로부터 가리워져 있었을, 맞은편의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할 당시를 재현해 벽에 그린 그림도 신비로웠다. 그 외에는 박물관이라고 이름 부치기에도 민망한 소규모의 전시관에서 더 볼 것은 없었다.
비가 올 거란 예보와 달리 날은 시간이 갈 수록 쨍쨍해진다. 길을 다소 오래간 걸어 맥도날드를 가려다 마음을 바꾸어 정식적인 브런치를 먹고자 한 노상식당으로 들어가 이탈리아의 Lavazza (라바짜는 이탈리아 브랜드이다)를 드디어 맛본다. 산뜻한 커피타임 치고 오고가는 주제는 무거웠다. 정상이란 무엇일지 가늠했던 시간. 한 친구는 오랜 외국살이를 하면서도 끊이지 않는 차별과 멸시에 (차라리 무관심이 낫다고 쓸쓸히 덧붙였다. 물론 이마저도 좋은 건 아니다만) 어느 날부터 터져나오던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그것이 꽤나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역시나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오랜 생활을 지나온 친구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때에 참지 않고 맞서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며 비단 그 순간의 나 뿐만 아니라 향후의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쟁취되어야 할 무엇이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진다면 잠재우기 힘든 분노의 무게가 점점 커지니 가끔 스스로 컨트롤이 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말했다. 두 친구의 말을 고작 -그렇지만 고작이라 해야 할까?- 1년 정도 살았을 뿐인 나는 아직 생소하여 서툴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훗날 일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이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 혹은 변하지 않은 채 싫어했던 것을 더 싫어하게 되거나 좋아했던 것을 더 좋아하게 될 수도, 혹은 나의 기존의 가치관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수도 또는 깨지지 않도록 더 견고해질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더한 분노와 우울과 격정에 나를 집어넣을 수도 있고 혹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으리라. 특히 이 후자를 타지에 나와 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라겠는가.
무거운 주제는 접어두고 다시 여행기로 돌아와야겠다. 짐은 도무지 올 생각이 없고 신발 역시 쪼리만을 의지한 채 벽돌 가득한 유럽의 거리를 걷느라 발이 성치 않은 친구와 신발을 하나 구입하기 위해 쇼핑거리를 나섰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큰길 너머로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과 갤러리아 거리도 멀리서 본다. 편한 신발로 찾은 친구와 상당히 신기한 구조의 밀라노 기차역으로 와서 최종 목적지가 취리히인 꼬모Como로 향하는 EC 열차를 탔다. 시간이 오후 두시가 다 되어갔다. 기차역이 크면 다수의 확률로 여러 열차가 같은 승강장을 쓰기도 하기 때문에 목적지가 완전히 달라지는 다른 기차를 탈 수도 있으니 승강장 외에도 열차번호와 같은 다른 번호들을 기억해야 한다. 이 뻔한 것을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도 걸음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꼬모로 도착해 기차에 내리자마자 확 트인 그야말로 자연의 아름다운 광경이 우리를 반긴다. 이런 확 트이고 시원한 공기를 맛볼 수 있는 곳을 하루 채 있지 못한다는 것이 벌써 아쉽다. 마트에서 점심거리로 이것 저것을 산 뒤 호수와 건너편 산이 보이는 잔디 위에 앉아 산 음식들을 늘여놓으니 여행 속의 여행을 온 것 같은 마치 동화의 순간을 만끽한다. 우연히 혼자 여행을 오신 한인 분을 만나 사진을 찍어드리고 덤으로 우리의 셋 전부가 나온 사진도 운좋게 얻게 된다. 그간 미뤄두며 전하지 못한 안부라던지 사는 이야기를 쨍한 하늘 아래 두서 없이, 그리고 명랑하게 흩어놓았다.
다소 나른해진 몸을 일으켜 노천카페의 야외자리에 앉아 잠을 깨우는 아이스 커피를 마시고 푸니쿨라를 타러 갔다. 느려보이지만 그래도 빠른 승강차 안 해가 중천에 떠 노란 윤슬로 반짝거리는 호수를 배경 삼아 젊은이들이 등을 지고 서로의 몸에 기대있는 모습이 꼭 청춘의 단면같다는 감상을 남긴다. 막상 올라가니 기대했던 풍경은 아니었지만 햇볕이 빼꼼하게 자리잡아 정면을 보고나면 눈이 멀 것 같은, 해가 지기 전 마지막의 발열을 뒤로 다시 여러 사진을 남겼다. 예정했던 시간의 기차는 이미 오래 동안 대기하고 있던 엄청난 인파에 두 세 차례를 보내야 했고 어느새 어둑해진 밤거리의 꼬모를 뒤로 하고 1시간 뒤의 열차를 몰래 올라 탄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여행에는 기어코 감행하는 것일까. 가령 지하철에 마련된 사진부스에 셋이 구겨앉아 사진을 찍는다거나, 늦은 밤 나키니 운하의 한 주점에서 정체 모를 추파의 대답으로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을 먼저 제의하는 것이나, 구글 맵스의 업데이트가 덜 된 안내 대신 이름 모를 이의 안내로 버스에 올라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등 말이다. 주점에 앉아서는 실로 여러 색깔의 대화를 했다. 지나서 돌이켜 보면 참 소소했다. 어찌저찌 숙소로 돌아와 뒤늦게 몰려든 숙취를 좇느라 새벽 세시까지 이어 일기장을 기어코 꺼내 일기를 써대고서야 비로소 밀려오는 잠의 수면에 잠긴,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갔던 세 번째 날이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356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35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