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그간 일기 쓰는 것을 잊고 지냈다. 그 사이 방학 내내 끌어오던 세미나 페이퍼를 완성도를 떠나 어찌어찌 제출하고 Master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어 버렸다. 사실 일기를 쓰며 오히려 잡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 한동안 쓰기를 멀리 했더랬다. 글을 쓰다 보면 필요 없는 생각까지 끄집어내게 되어 그랬던 걸까. 다만 그러다 보니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보며 무료하게 아침을 허비하는 것이 점점 늘어나 다시 이렇게 아침에 글을 쓰리라 오랜만에 일기장과 만년필을 꺼낸 것이다.
그 사이 다른 일로도 부지런했다. 사람들을 만나 어떨 때는 지루한, 어떤 때에는 시간이 지나가는 게 아쉬울 만큼의 거창하지는 않지만 환기가 되어주었던 시간들을 보냈다. 열심히 사랑을 가꾸기도 했다. 독일어로 된 책을 이렇게 단기간에 많이 읽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부지런히 책과 논문을 읽었다. 동시에 여전히 제자리인 듯한 실력에 한숨도 나오지만 이런 요지부동의 어학 상태에도 적응을 하는 것 같아 경계심도 든다. 소홀함에 익숙해지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랴. 좋아하는 것들을 양껏 미뤄두기도 했다. 그동안 영화를 본 것도 손에 꼽고 소설책도 마찬가지며 날씨가 춥다는 핑계로 산책마저 멀리하여 보낸 지난 두 달이었다.
작년은 이미 따뜻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이제야 날이 풀리는 듯하다. 한국에 두고 온 겨울 코트들이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다는 딸의 한 마디에 코트에다 이곳에서도 아시아 마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한국의 음식들을 꽁꽁 싸서 행여나 내가 굶기라도 할까 빈자리 없이 무겁게 채운 두 박스에는 부모님의 동봉된 사랑이 흠뻑 느껴져 역할을 다한 큰 종이박스를 버리기에도 며칠을 망설였다. 스위스로 부부 여행을 온 외가 쪽 사촌언니와 형부와 연락이 우연히 닿아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 오직 나와 두세 시간을 보내기 위해 새벽부터 고속도로를 달려 내가 사는 도시로 일부러 찾아와 먹다 남은 것이라며 큰 쇼핑봉투에 한국의 식재료를 가득 담아 건네는 형부의 손에는 일부러 나를 위해 급하게 잡힌 약속 이후에 물가 비싼 스위스의 아시아 마트에서 골랐을 것이 여력한 따뜻함이 묻어났고, 오랜만에 만난 사촌언니가 나를 향해 짓는 웃음과 말투는 엄마와 너무 닮아 있어서 꼭 엄마와 짧은 여행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졌다. 특히나 언니가 어린 것이 타지에 나와 고생한다며 (엄밀히는 나는 어리지 않고 딱히 고생을 하고 있지도 않으나) 마지막에 괜스레 눈가를 붉히던 모습은 아직도 부모님과 사촌언니네가 오롯이 나를 생각하며 보냈을 식재료 옆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리고 그 사이 작은 삼촌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급작스러운 비극이라 아빠는 여전히 상심에 잠겨 계신다. 오직 누군가에 대해서만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지상에서는 비록 차가웠을 테지만 그곳에서 더 행복하게 지내시지 않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주변에서도 잇따른 소식을 들으며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소식은 한 번도 들리지 않음에 태어남은 죽음보다 더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오늘이 4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 달에 최소 한 곳은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리라 다짐했던 것은 지난 3월 말 베를린을 친구와 다녀온 것 이후로 시들해졌다. 훌쩍 떠나는 것은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가 다시금 새겨진다. 몸은 물론이고 마음도.
잠깐 해가 화창했을 때 운 좋게 꽃까지 만개한 날이 있었다. 낮에는 C가 성당 앞 만개한 꽃나무들 아래에서 사진을 찍어주었고, 같은 날 늦은 저녁에는 한국인 친구들이 열성을 다해 다채로운 사진을 Residenz 안에서 담아주었다. 작년에도 꽃을 구경하러 나름 다녔으나 나와 꽃을 피사체에 함께 담기보다는 꽃만을 열심히 사진에 담았는데, 1년을 돌아 이리 나와 사진을 함께 담아주는 어여쁜 사람들을 만난 것에 지난 일 년을 헛살지는 않았다며 어여쁜 주변 사람들과 지나온 시간들이 감사해진다.
일기장을 멀리 한 두 달 반 동안 스쳐가거나 머물렀을 많은 감정과 수없는 문장들이 있었겠지만 그것들은 이렇게 몇 줄의 소회로 남게 되었다. 어떠한 것을 보고 들으며 어떠한 감정을 느꼈던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그 순간들은 또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하지만 무심하게도 내일은 오늘의 자리를 대신하겠지. 일기 쓰는 것을 페이퍼 쓰는 것으로 대신하며 살아온 두 달 반 만에 다시 오랜만에 일기장을 편 지금의 아침처럼 말이다.
일기를 쓰지 않으며 또렷하게 느낀 것은 하나 있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라는 것. 불행은 요란하지만 행복은 그저 덤덤할 뿐이다. 인생도 사랑도 인간관계도 일의 성취도 그래왔다. 순간순간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허무함과 권태 속에서 발버둥 치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이러한 부산스러움이 꼭 소란스럽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저 잘 먹고, 많이 걸어 다니며, 내일의 걱정 정도로 불안의 양을 한껏 줄이고서 단조로운 삶을 지겹고도 묵묵히 살아내야겠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590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39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
* 부제는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평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