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와 어둑한 친퀘테레
전날 밤 일정 시간을 지나니 숙취보다 피곤함이 더 몰려와 눈을 감았는데, 7시 언저리 즈음 기묘하게 눈이 떠졌다. 전혀 피곤하지 않고 각성한 듯 오히려 평소보다 정신이 더 말끔한 느낌이다. 오랜 준비를 마치고 오전 시간 동안은 각자의 여정대로 움직이기로 하고 오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채 체크아웃을 했다. 짐이 무거운지라 역내에 마련되어 있을 보관소를 찾았는데 이미 길게 서 있는 대기줄에 괜히 헛걸음을 했다. 차츰 몰려오는 피로를 몰아내기 위해 알아둔 카페의 야외자리에 앉아 커피와 빵을 한 모금 삼킨다.
어깨에 짐을 짊어지고 낯설지만 묘하게 바쁜 아침의 공기를 머금은 거리를 걸었다. 솔직히 숙소와 밀라노 중앙역 근처의 거리는 사람이 많기만 하고 대관절 이곳이 밀라노가 맞기는 한 건지 매력을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는데, 이 곳의 길은 꽤나 멋졌다. 물론 짐을 이고 다니느라 그 순간도 길게 느끼진 못했지만.
내셔널 갤러리는 마음이 급해 서둘리 본 것치고는 금새 관람을 끝낼 정도로 공간이 많이 크지는 않았다. 평소 그리 마음이 끌리지 않는, 거의 종교와 신화에 관련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는데도 바라보고 있자니 깊은 숭고함이 들면서 이곳에 사는 이들을 질투했다. 가까이에 이다지도 아름다운 것들을 두며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란 어떨까.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생각보다 빨리 끝낸 관람에 임마누엘 갤러리아 골목을 구경할 겸 라바짜Lavazza 플래그쉽 스토어에서 멍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2차로 카페인 타임을 가지고자 발길을 돌렸다. 골목 골목 아는 브랜드는 아니지만 가죽과 포스터를 파는 곳, 잡화, 향수 등을 판매하는 작은 가게들이 그 자체로 아름다워 스쳐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갤러리아 거리는 기대를 전혀 가지지 않아서였는지 생각보다 웅장한 규모에 놀랐다. 바로 전날 엘리자베스 여왕의 작고 때문인지 한 서점에는 그녀를 다룬 책으로 유리창에 빼곡히 진열이 되어 있다.
카페 내부로 들어와 오전까지의 여행기를 반쯤 허공에 떠 있는 정신상태로 쓰고는 역시나 책을 마저 읽었다. 짐은 다행스럽게도 미술관의 로커에 보관해 두어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추어 다시금 가지러 갔다. 이 루틴은 이후 짐을 고생스럽게 들고 다니는 여정마다 실행하곤 했다. 몸이 가벼우면 여유가 생겨 눈에 담기는 것도 오래 남는 법이다.
근처의 소담스러운 돌길이 있었는데 마침 그 곳이 오후에 친구들과 다시 만나기로 한 곳이었다. 골라 들어간 한 곳의 야외 레스토랑 메뉴에 최근 영화 <루카>를 보며 만들어 먹고 싶었던 제노바식의 요리가 있어 친구들을 설득해 시켰는데 그녀들도 좋아했다. 이탈리아에 와서 적어도 음식에는 실패가 없다. 오전 동안 미술관과 갤러리아 거리를 거닐며 적어도 관광을 한 나와 밀라노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갤러리아 거리와 근처 소품샵을 둘러보며 마찬가지로 여행의 기분을 내었던 영국서 온 친구와 달리, 이제서야 짐이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다른 친구가 숙소에서 바로 받을 수 있냐는 질문에는 감감무소식인 상황에서 과감히 짧게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포기하고 직접 공항에 짐을 찾고자 떠날 예정이었더랬다. 이는 낮에 친퀘테레Cinque terre로 넘어가고자 미리 기차표를 예매해두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사실 공항에 직접 짐을 찾으러 가는 것은 친구에게 불가피한 선택이기는 했다. 물론 이렇게 짐이 늦게 도착할지, 그리고 공교롭게 이 날 기차 전체가 파업에 들어가며 모든 열차가 취소되는 상황은 그녀도, 우리도 다 예상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도착한 밀라노 중앙역에서 전광판에 줄줄이 기차가 취소되는 영화같은 순간을 목격해야 했던 친구는 혹시나 한 자리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오전을 내내 그 곳에서 기다리기만 했고 그러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춰 레스토랑에 온 것이었다. 새로운 계획을 짜야 했으나 그 누구도 계획형은 없었던 우리는 그래도 알량한 기대를 품으며 '우리 세 사람이 누일 자리 하나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여유롭게 중앙역으로 돌아왔는데, 역시나 친퀘테레로 가는 기차는 취소가 되었고 어마어마한 행렬의 여행자들을 보자 그제야 실감이 나면서 여차 하면 오늘 친퀘테레로 가지 못할 수도 있고 길거리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렌트카가 다음 옵션으로 떠올랐지만, 세 명 다 해외에 오래 나와 있던 까닭에 국제면허증의 유효기간이 끝나 있었고 (유럽에서 우리나라의 면허증은 우리나라에서 국제면허증으로 발급 후 1년까지만 유효하다) 역시나 발 빠르게 움직인 다른 사람들로 이미 가능한 렌트카는 없었고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대의 럭셔리한 차만이 남았을 뿐이며 그마저도 우리가 가진 운전면허증으로는 주행이 불가했다. 역내 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 닿을 수 있는 다른 장소의 렌트카 업체에도 전화를 하느라 역 근처에서 거의 3-4시간 가량을 어슬렁거렸는데, 마찬가지로 파업에 갈길을 잃은 다른 여행객들로 역내 카페들도 인산인해였다. 다행히 파업이 다섯시 이후로는 끝난다는 소식에 터미널에 머물며 전광판이 보이는 2층의 식당에 앉아 한 사람당 와인 한 병씩을 시켜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했다. 그 와중에 역내 식당의 아무렇게나 시킨 음식도 그저 맛있어서 우리 셋은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다만 기차표를 예매하지 않은 채 어쩌란 심정으로 (파업이 우리의 죄는 아니잖아욧) 기존의 표만을 가지고 두 좌석이 마주보는 자리에 냅다 앉아버렸는데, 역무원이 와 보여주니 그냥 넘어갈 뿐이다. 독일의 열차도 꽃말이 연착이라 불릴 지경인데, 이탈리아의 교통수단은 더 어메이징한 수준이었다.
본래는 다섯시 쯤이면 도착해야 했을 곳을 그 이후에 출발을 한 셈이었으니 해가 지는 것을 기차의 창밖으로 훔쳐본다. 3시간 가량을 책을 읽었다가 깜빡 졸았다가 이야기를 나눴다가 기차 안에 위치한 자판기에서 꺼내어 무언가를 마시다 보니 검게 내려앉은 몬테로소Monterosso에 드디어 도착했다. 역에서 나오는데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곧바로 들려 조금만 걸음을 옮기니 마침 보름이라 꽉차게 떠 있는 환한 달이 하늘의 몇 자락 있는 구름과 해변을 살풋 비추는 것이 장관이었다. 무한한 대기에 녹초가 되었던 피곤함이 금방 가시고 설레임이 커져 숙소에 짐을 서둘리 두고 친구들과 밖으로 나서서 마실 거리를 찾아 유일하게 열려 있는 식당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 곳이 우연치 않게 미슐랭의 타이틀을 단 곳이라,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한 번 경험해보자 다짐했던 호화로운 식사를 이 곳에서 준비 없이 맞이했다. 점원이 추천한 화이트와인은 너무 달지 않아 맛이 있었고 대학 시절 술로 꽤나 날았던 전적을 가진 우리로서는 당연히 부족하여 숙소에서 더 마실 요량으로 레드와인을 기어이 하나 더 사가고야 말았다. 신기한 모양의 음식은 하나같이 다 오랜 기다림으로 지친 우리의 영혼을 달래줄 만큼 맛있었다. 알딸딸한 취기로 숙소로 돌아와 묵은내를 털어내고 세로로 길게 나 있는 숙소의 가장자리 식탁에 둘러앉아 레드와인을 마시며 이곳에 와서까지 전공 이야기를 해댔다 (사실 모두가 학부 때 법을 배웠으니 뭐, 하지만 미안하다 친구들). 이틀 연속으로 숙취가 생길 때까지 마신 꼴이다. 바로 몸을 누이니 어지럽고 입이 바싹 마르지만, 새벽 세시까지 이어진 우리의 밤은 아늑하고 달았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357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42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